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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깡 Aug 21. 2019

내가 이 노래를 듣지 못했던 이유(2)

스윗소로우 - 바람이 분다

학교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의 거절을 조금은 예상했던 탓에 어느덧 그 친구를 잊어가고 있던 때였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니 모르는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됐고, 이 전화받아봐'


친구 목소리였다. 번호를 바꿨나?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수화기를 끊지 않고 있었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밤 제주도에서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그때와 똑같았다. 수줍은 인사와 잠깐의 정적. 이 번호가 내가 바라던 그 친구의 연락처구나. 어안이 벙벙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약간은 어색한 통화가 끝이 났다. 실실 웃으면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소리를 질렀다. 이젠 마음 놓고 있었는데,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서둘러 첫 문자를 보냈다. 글이 너무 길면 MMS로 갈 테니 조금 간략하고 농담 섞인 어조로 밤새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린 서로 야자가 끝나면 운동장을 한 바퀴씩 걷고 집으로 향했다. 가끔은 미리 10분 전부터 야자를 도망쳐 나와 학교 앞 편의점에서 딸기 우유와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사고 그 아이를 기다렸다. 정말 말 그대로, 만나면 웃음부터 나왔다. 빨대 하나를 입에 물고 오물거리던 그 아이가 너무 예뻤다.


고3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이 있기 때문에 우린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자습을 해야 했고, 자습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 아이의 집 근처에는 또 다른 도서관이 있었지만 우린 항상 중간지점에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공부를 빙자한 데이트였을지도 모른다. 당시엔 '썸'이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표현을 못하면 어떠하리, 몇 주를 붙어 다니면서 우린 교내의 암묵적인 '썸' 타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지루했던 등교가 두근거리던 나날이었다.




점점 수능이 목전 앞으로 다가왔다. 방학 아닌 방학을 지내고 9월 모의고사가 치러졌다. 점수는 처참했다. 하긴 공부도 안 하고 그 아이 쳐다보기만 바빴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아이도 점수가 그리 좋지는 않았었나 보다. 지금같이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 후회할 걸 깨달았던 걸까, 우리 사이는 예전만 못해졌다.


나의 행복은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있었다. 그 아이의 뒤에 매달린 줄을 잡고 한없이 흔들리던 나였다. 어느 순간 변해버린 그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탓에 나는 집착을 했고, 혼자 슬퍼했다. 예전의 소심했던 내가 그랬듯이 나는 생각이 많아지고 조마조마해졌다. 온갖 나쁜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부정적인 시선들로 모든 걸 바라보았다. 물론 '그럴 리 없잖아'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누군가가 항상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반박하기 바빴다. 내가, 내가 나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며칠을 끙끙 앓다 친구에게 솔직히 말했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힘들다고. 당연히 친구는 나를 도와주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어느덧 밤하늘이 겨울의 삼각형을 보여주던 때,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태 네가 그랬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그래서 그렇게 날 피하면서 그런 거구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연락하자. 적어도 수능 끝나기 전 까지는 연락 안 해줬으면 좋겠어.'


머리가 띵했다. 무언가에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공부는커녕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행복이란, 나 자신에게서부터 오는 게 아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어리석게도 고3의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아직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늘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달라져있던 건 나뿐이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났다. 이 날만을 기다렸다. 내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었어도 그 아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인 것을 그땐 잘 몰랐었다. 그렇지만 정작 기다렸던 순간이 오자 긴 시간 동안,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지난 몇 달간 썼다 지웠다만 반복했던 그 아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결과는 당연했다. 미안하지만 만날 생각이 없다는 그런 뻔한 답변. 얼떨떨했다. 금년이 가기 전, 친구네 집에서 진창 취했고 그녀를 잊기로 마음먹었으나 어찌 쉽게 잊히겠는가. 게다가 몇 주 뒤, 그 아이에게는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다. 물론 그 남자 친구는 나와도 사이좋게 지내던 다른 반 친구였다.


내가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나만의 궤도 안에 있었지만 나의 집착과 어리석음은 그녀를 튕겨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않았던 그 아이를 다른 친구가 데려간 것일 뿐, 내가 그를 탓하기에는 너무나도 유치하고 한심했다.


아무 목적지 없이 마냥 걸었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이어폰으로는 정말 우연찮게도 '바람이 분다'가 재생되고 있었다. 여름에 시작된 인연이 그해 겨울에 끝이 났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내가 그동안 바라 왔던 소원들이 허무하게 흩어져 갔다. 너와 나의 추억은 다르게 적혔다. 잘 가라는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5년간의 첫사랑은 오로지 나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대학교는 모두 같은 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군대에 가기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너를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있지만 그게 정말 너였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지금은 괜찮지만 한때는 이 노래를 잘 듣지 못했다. 누군가 이 노래를 추천하거든, 머쓱해하며 듣기를 거부했었다. 그녀가 생각나기도 하고 정말 한없이 어렸던 내가 창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사를 정말 시리게 곱씹었던 때가 생각나기도 해서. 뭐 그렇다. 정말 옹졸한 이유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이유.




사람들에게 노래로 라벨링을 한다면 너에겐 '바람이 분다'를 붙이고 싶다. 나에게 이 노래가 커다란 의미였듯이, 그때의 너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를 다시 돌아보게끔 해준 시간이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난 어떤 큰 실수를 저지르고 또 후회했을까. 미안하고 또 감사했던 시간에 너가 있었다.


그땐 듣기를 거부했던 노래를 지금에서야 다시 듣는다. 예전 같았으면 씁쓸해하며 몇 소절 듣다가 바꿨을 테지만 지금은 그때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는 걸 느꼈다. 이젠 몇 문장으로 끄적일 수 있는 추억이 되었구나. 어쩌면 너에겐 추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함도 든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바람이 살며시 불어온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아닌 적당히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 있던 머리 위로 그렇게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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