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거센 태풍이 지나갔다. 비가 내리고 날이 갠 하늘에 별이 드리우고 정적이 흐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늘은 조용했다. 아직까지 심술을 부리고 싶은 걸까. 남아있는 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지만 그 사이에 짙은 파란색의 밤하늘이 피어오른다. 오리온 벨트 별자리가 희미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시린 삼각형이 때 이르게 명멸한다.
8년 전 제주도에서 처음 마주했던 별자리.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별자리다. 잠깐의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올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등 같은 별자리. 처음 봤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을까. 그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가. 벤치에 앉아 바라만 보다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한 장으로는 아쉬워 셔터를 한 번 더 누른다. 두 장으로는 아쉬워 또다시 누른다. 그렇게 나의 앨범이 같은 하늘로 채워질 때, 용량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다. 조금 정리가 필요하겠구나. 지울만한 사진들 좀 정리해야겠구나.
새벽에 나 혼자 앉아 지나간 기억들을 정리한다. 행복했던 순간, 기뻤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들이 하나의 이미지들로 남아있었다. 사진은 매개체와 같다. 한 장의 사진에서 그때의 상황이 재생된다.
요 근래 몇 달간 그리 밝게 지내지는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사진들을 바라보니 깨나 적잖은 괴리감이 밀려들었다. 행복했던 나의 시간이 그립고 질투가 난다. 사진 속의 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땐 참으로 행복했구나.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웃음 짓기엔 지금의 내가 너무나도 초라했다.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하나 둘 쌓여간다. 자다가도 우연찮게 생각이 나면 그 날은 밤을 뒤척이며 보내기도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라는 후회에서부터 대체 나한테 왜 그럴까 라는 원망까지, 했던 생각을 다시 재생시킨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도 됐는데 쉽사리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재생시켜야 할지도 모르는 고민일 수도 있겠구나. 이게 업보라면 업보겠구나. 결국엔 체념으로 마무리하지만 다음 날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생각에 또 다른 밤을 지새운다.
나를 다독이려 손을 댈수록 수채화 속 하늘은 뿌옇게 바래져간다.
차라리 좋았던 기억들이라도 잊힌다면 더 편하지 않을까.그래서 지금의 슬픔이 더욱 대비가 되는 건 아닐까. 처음부터 슬펐다면 지금쯤엔 익숙해졌을 텐데. 감정이 요동친다. 울렁이는 거센 파도가 되어 끊임없이 허우적거린다. 어쩌면 좋았었던 기억들이 지금의 파도를 키워낸 건 아닐까.
가을에 접어들며 매년 만나게 되는 시린 삼각형을 바라본다. 예전의 행복했던 기억을 또다시 마주한다. 지금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예전의 좋았던 기억들을 지워버렸으면,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