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노웨어, 나우 히어
소녀 시절의 류드밀라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공상에 잠겨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 공생 가설, 김초엽 -
소녀는 공상과 몽상에 빠져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갔다.그러나 유토피아를 꿈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알게 된 이후에는 유토피아의 정의가
마음속을 파고들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임이
지배적으로 자리했다.
그래서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우주 너머에는 유토피아가 존재할까?
소녀는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유토피아를 꿈꿀 여유를
박탈당한 것은 아닐 까?
다양한 빛깔의 프리즘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만의 이상향이 있다.
자신이 그리는 이상향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매일 나아간다.
그 길에는 험난한 장애물이 놓여 있고
가다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다.
'지금 열심히 나아가면 내일은 좋아질 거야,
미래에는 웃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바라는 걸 얻으면 행복할 거야.'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노를 젓는 뱃사공처럼
그들은 나아간다.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도 손에 물집이 잡혀
피가 철철 나도 저기 뭔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미한 빛을 향해 우리의 유토피아를 향해...
그것은 과연 도달할 수 있는 이상향인가?
눈앞에 생생한 듯 있다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인가.
어딘가에 존재하면서도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 공생 가설, 김초엽 -
존재할 것 같지만 또 너무 먼 곳에 있는 유토피아는
희망인 듯 희망 아닌 모습으로 우리를 이끈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걷는 걸음걸음마다 놓여 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아득하게 먼 곳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 발 밑을 내려다본다면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내가 꿈꾸는 모습들이 빛날 것이다.
사막에 오아시스를 찾아 숨을 헉헉대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만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서 반짝거리는 모래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다면 설령 오아시스를 발견하지 못해도
그 순간의 행복이 빛나지 않을까?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 공생 가설, 김초엽 -
우리가 찾는 유토피아는 사실 원래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일.
나의 본질을 찾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일. 내가 놓아버린 나를 다시 기억해 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