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으로 진득하게 앉아 읽는 장편소설이 버겁다. 영화마저 2시간 러닝타임 틀을 깨고 OTT에 6부작으로 쪼개 시리즈를 내놓는 추세다. 다큐멘터리나 대하소설처럼 꾸준하게 집중해야 하는 콘텐츠에는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다행인 점은 나만 이렇지는 않다는 거.
요즘 시대 가장 환영받는 소설가는 김동식 작가가 아닐까. <살인자의 정석>은 330페이지짜리 책 한 권에 무려 26편의 단편소설을 담아 소설계의 숏폼 같은 재미를 준다. 짧고 빠른 호흡으로 몰입감있게 읽히는 그의 소설은 더운 여름, 짜증 없이 유쾌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김동식의 소설은 이 시대의 도덕을 다룬다. 표제작 <살인자의 정석>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 최무정은 정수기 영업을 하러 간 가정집에서 우연히 몇 달 전 자신이 죽인 여자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완전 범죄를 저질러 세상 사람들은 그의 살인을 아무도 모른다. 우연히 찾아간 집에서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 바로 그녀의 부모임을 알게 된다. 최무정은 당황하지 않은 척 정수기 영업을 이어나간다. 죽인 사람의 부모를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당장 실적이 아쉬워 영업을 이어간다.
피해자의 아빠와 멀어지고 싶었지만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점점 가까워진다. 같은 야구선수를 좋아하고, 같은 대학교를 나왔고, 아빠는 심지어 자신의 회사로 들어오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최무정은 회사에 들어가 사내 연애도 하고, 승진도 하고, 필리핀 출장도 간다. 필리핀에서 피해자의 아빠는 강도를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최무정은 사과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입을 다문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은 가상현실이었다.
여태까지 최무정이 겪은 일은 자신의 범행을 고백할 가상현실 테스트였고 최무정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최무정은 교화 불가능 판정을 받고 세상과 영원히 격리된 곳으로 떠나며 이야기는 끝난다.
범인 교화 가능성을 가상현실로 시험하는 프로그램은 정말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아는 가상현실은 아직 게임이나 영화 같은 여가를 즐기는 목적에 머물러있지만 점차 수사 프로파일링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도 있겠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김동식 작가는 스스로 "도덕적이다", "정의롭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정제된 물음을 던져 부끄럽게 만든다. 김동식의 소설을 보면 불편하다. 나 살기도 바쁜데 자꾸 스스로를 돌아보라 하고 세상도 돌아보라 한다. 이상한 점은 편한 것만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시리즈가 10권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그중 많은 책이 중고등학생들 손에 쥐어져 독서모임 교재로 활용된다고 한다. 짧은 단편이라 읽고 바로 토론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불편과 기꺼이 맞서기 시작했으며 이겨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온라인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가 낳은 작가 김동식의 소설집 7권은 전작들보다 깊숙이 사람의 내면을 파고든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내용은 좀 더 우리 사회와 밀접해졌다. 갑자기 일어난 재앙 같은 일들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볼 수 있는 사회의 아픔을 다룬 작품이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해서 모른 척 살고 싶었던 우리 사회의 모순들은 여전히 툭툭 튀어나와 독자의 마음을 꼬집고 할퀸다.
작가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던 시절의 마음가짐은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 이 중에 네 취향이 하나는 있겠지'였다는데, 종이책은 콘셉트에 맞춘 통일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비슷한 이야기들을 묶었다고 말한다. 소재는 눈에 띄는 모든 것에서 자연스럽게 찾는다고 밝혔다. 화제가 되는 유명한 사건에서 가져올 수도 있고,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한줄 댓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면서 흥미로운 상황이 떠오르기만 하면 이야기는 끝없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담백 소탈하게 써 내려간 그의 소감 속에 독자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드러난다.
독자들이 돈을 내고 소설책을 사 보는 것이 뿌듯하면서도 부족한 글로 돈을 받아도 되나 싶은 죄송한 마음도 든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김동식 작가는 더욱 성실하게 글을 쓰고 독자들과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김동식 작가가 부디 오래오래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우리 사회를 쿡쿡 찌르는 불편한 작가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