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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Aug 01. 2023

하마터면 나의 삶을 하찮게 취급할 뻔 했다.

#4. 비하인드 스토리(1)

요즘 회사에서 발표를 자주 한다. 직업 특성상 데이터 분석 업무를 제외하고는 프로페셔널한 매너로(소위 각 잡고) 이야기할 일 별로 없는 편이라 적성에 딱이다 생각하던 차였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있던 이전 직장은 컨설팅 회사였. 사람들과 말할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클라이언트와의 회의가 잦았을 뿐만 아니라, 클라이언트라면 무조건 Yes를 남발하는 대표 덕에 다음 회의 때 또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말을 해내야 하는 상황을 많이 힘들어 했었다.


데이터 분석가/사이언티스트 업무의 가장 중요한 스킬 중 하나는 Communication skills이다. 코딩을 하고 모델을 만들고 분석하는 일이 주요 업무지만, 프로세스를 의논하고 결과를 공유하는 스킬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국 결과를 공유하는 방식의 핵심은 다른 모든 분야와 같다.


Storytelling



왜, 이 분석을 시작하였으며

무엇을, 성취하기 위하려 함인지

혹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분석을 하였는지

혹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과 함께 답을 찾아 데이터 분석의 관점이 아닌, 비즈니스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아무튼, 위 과정의 축소판 정도로 일주일에 한두 번 함께 일하는 팀원들, 혹은 이미 안면을 익힌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공유하는 정도로만 회의에 참여해왔는데, 어느 날 미국에서 새로 온 VP는 호주 지사 다른 팀들에게 Finance의 기초에 대한 교육을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 지목을 한다.


아니 왜?


지목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의아했던 선택. Finance Data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Finance의 기초라면 우리 팀에 널리고 깔린(?) 회계사들이 더 잘할 텐데. 게다가 나보다 훨씬 유창하고 멋지게 말할 수 있는 팀원들이 있는데.


굳이. 왜 내가?




이곳에서 나름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으나 나에게는 찌질하게 따라다니는 말 못 할 열등감이 있다.


1. 나는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하지 못한다.

2. 살 길을 찾아 헤매느라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짧다. 

(이 외에도 줄줄이 나열할 수 있으나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이곳에서 나고 자랐거나, 아니면 어렸을 때 유학을 오거나, 가족이 이민을 평탄하게 대학 졸업 후 커리어를 시작한 지금 대부분의 동료들을 보면, 부럽고,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런 날들이 있다.


요즘에는 해외 한 번 제대로 나가지 않고도 영어를 참 잘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러니 위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영어를 못한다는 건 핑계가 되겠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도망치듯 나오면서도 영어를 쏼라쏼라 잘하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는 누가 쓰고 버린 윤선생(아는 사람?) 책을 지우개로 지우며 공부했고, 그렇다고 문법이나 읽기를 그리 잘한 것도 아니었다. 회화학원은 따로 다녀보지 않았고 대학 때 과외하며 모은 돈으로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왔다.


아무튼! 갑작스레 맡겨진 발표. 준비해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음 달 말에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고 중간 관리자에게 전달을 받았는데, VP와 잠시 대화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그게 아니라 이번주에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속으로 아 뭐야 하는 생각도 잠시, 정신이 번뜩 든다.


딱 3일 남았다. 그때부터 엉덩이가 뜨거운 송아지처럼, 한도초과한 긴장에 불안이 더해져 잔뜩 겁을 먹고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왜 겁이 났을까.



나의 자아는 혼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내가 못해낼까 봐. 기대에 못 미칠까 봐.

할 수 있어. 하면 돼.라는 목소리 보다, 너 이거 할 수 있겠어? 이래서 되겠어? 라는 채찍질과 의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첫 세션인 20분 정도의 발표를 위해 꼬박 이틀의 업무시간 + 밤에 애들 재우고 슬라이드 업데이트&발표 녹음&연습 + 발표 당일 오전까지 모든 시간을 바쳤다.


우리 팀에서는 처음으로 여는 트레이닝 세션으로 리더들의 기대가 큰 만큼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쳤는데, 이 모든 시간을 다 합하니 27시간(1620분) 정도.


단 1.2%의 시간을 위해 98.8%을 할애한 셈이다.


발표할 포인트만 써 놓고 그 포인트를 중심으로 자연스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너무 긴장하여 머릿속이 백지가 될까 봐. 그러다 결국은 버벅댈까봐 스크립트를 문장으로 문단으로 줄줄줄 써두었고, 대사 하듯 또 줄줄줄 외울만큼 연습했다.


세션을 마치자마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온다. 잘 이끌어주어 고맙다는 메시지가 담긴 디지털 카드와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를 받고, 다음에도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이메일,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 사내 메신저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그 후 4개월이 지났고, 그 사이 나는 5번의 서로 다른 세션을 더 참여했다. Finance부분 뿐 아니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인사이트와 활용 방안을 호주의 팀들과는 물론, 다른 나라 직원들과도 공유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왔다.


발표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그래서 좀 짧아졌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도 않다. 아직까지도 나는 겁이 많아 스크립트를 쓰고, 발표 준비와 연습에 98% 정도의 시간을 할애한다. 여간 효율적이지 않은 작업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참 불편하고 힘들다. 여전히 발표를 한다는 일이 부담스러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데이터 분석에 관한 이야기를 150여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모두 다 집중하여 듣지는 않겠지만, 워킹홀리데이 당시 한 달 머물렀던 홈스테이 프랑스인 부부가 영어로 말하는지 불어로 말하는지 구분도 못하던 실력에 비하면, 지금 이만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나보다 훨씬 잘 하는 동료들과 비교하느라,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나의 삶을 하마터면 하찮게 취급할 뻔 했다. 자신감 있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자주 불안했다.


뒤늦게 영어를 익혔고, 뒤늦게 커리어를 시작하면 뭐 어떤가.


완벽하지 않지만, 나만의 호흡으로, 어느 방향으로든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찌질하게 따라다니는 열등감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도록, 내게 주어진 삶은, 느리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정성껏 채워가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Visualize_Tom



발표 준비할 때 힘이 된 이미지가 있어 공유한다. [완벽]을 목표로 하면 스트레스와 압박감으로 금방 포기하거나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good enough 가 되어도 좋으니 도전해보자 라고 관점을 바꾸면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집중하고, 연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Accomplish, 성취]의 단계로 이끌어준다. 우리는 완벽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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