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마흔을 바라보는 상황이고
예전에 비해 충동적인 선택과 판단은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러한 성향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철없는 20대와 30대 초반에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싫증이 나서 사직서를
날린 적도 많아요.
마치, 고양이가 멀쩡한
물건을 내리치듯
이유는 없었어요.
대학교 시절부터 공부해
두었던 중국어 덕분에
공항 면세품 인도장에서
일을 할 수가 있었는데요.
웃으며 퇴근한 다음날,
갑작스레 문자로
장문의 사직서를 보냈던 적이 있어요.
그냥 모든 게 싫어졌어요.
인천에 살고 있음에도
인천공항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게 짜증 나기 시작했어요.
굳이 이렇게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매일매일 몰려드는 관광객들도,
근무 시간이 매번 바뀌는 스케줄도,
그냥 했던 고가 면세품 확인작업 같은 것들도
하나하나 다 마음에서 떠나가기 시작했거든요.
계약직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계약 연장이 되질 않아
실업급여를 받던 때였어요.
사실 회사 다니기 너무 싫었을 때라
계약 연장이 되지 않은 것에
쾌재를 불렀긴 했습니다.
실업급여 수급기간엔
취업활동을 해야 했기에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는데요.
그때 마침 보였던 게 일본어 학원이었어요.
전공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넣었던
학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호기롭게 시작한
일본어 강사도 한 달 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어요.
일본어 강사를 하기로 한지
일주일 만에 퇴사 통보를 했습니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되었다는
솔직한 퇴사 사유를 말했습니다.
그때의 학원장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국비지원으로
바리스타 자격증 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배우다 보니 카페를 차리면 어떨까?
혼자 망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이사를 가려고 모아둔 돈을 홀라당
어느 대학교 후문에 있는 매물에 사용하게 됩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행복 회로를 돌리며 인수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깨닫지 못했어요.
환상과, 현실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이죠.
안 되니까 가게를 넘긴다는 팩트를 말이죠.
한 일 년은 이렇게 저렇게
맨 몸으로 부딪힌 상태로
카페를 넘기게 되었어요.
다행히 넘기니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진 않았으니, 이거 러키비키잖아?
는 헛소리입니다.
카페를 하면서도
수시로 인테리어도 바꾸고
새로운 메뉴를 넣고 빼면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함께 시작을 했던 그 당시의 연인을
떠나보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그 사람은 이미 나를 떠나보내는
중이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거든요.
직업도 이리 쉽게 시작하고 관두는데
취미는 얼마나 더 쉽게 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원데이 클래스로 베이킹도 배워보고,
클라리넷 과외도 받아보고,
통기타 소모임에도 나가 봤고요,
최근에는 보컬을 배우겠다며
호기롭게 시작을 했어요.
하지만 모두 한 달 정도에서
길어봤자 두 달이었습니다.
수많은 돈을 레슨비용과
재료, 도구 사는 데 썼습니다.
취미와 경험은 많지만
실질적으로 내세울 것은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어요.
막상 남는 게 없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나는 제대로 마무리를
해낸 게 없다는 자괴감과,
끝내지 못할 거면서
왜 멀쩡히 다니던 데를
관뒀는지에 대한 후회,
그리고 허울뿐인
자기 포장과 변명만이
남아 나를 감싸고 있더라고요.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젊은 날의 패기라고 느꼈던 것들은
그냥 별 볼일 없는 것들이었어요.
한 우물만 파던 친구들 뒤에
이룬 것 없이 서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호기롭게 퇴사한
면세품 인도장 한가운데,
함께 일했던 전 동료에게서
우물쭈물 물건을 수령하는
초라한 내가 있더라고요.
내 옆에 있었지만 외로워했던
연인을 떠나보냈고,
늘 바빴던 나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도
떠나갔다는 것을 깨닫기엔
너무나 늦은 상태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시작한
연애에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상황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