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4
해가 뜨는 시간. 하늘은 이미 훤히 밝아 있고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낼 지평선과 그 위의 구름만 불이 붙은 듯 벌겋다. 그렇게 한 참을 기다리면 태양이 빼꼼히 솓아 오르는 데 그 기다림의 시간은 왠지 모를 긴장감이 있다. 해가 뜨는 순간, 새들은 지저귀기 시작하고 거미는 자기집을 한 바퀴 빠르게 돈다.
해나 뜨는 순간은 이 별에 살고 있는 생물들에게 깨어남의 시간이다. 고단한 몸이 쉬게 했던 잠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하루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 땅의 생물들은 해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해와 함께 하루를 마친다. 새들과 물고기들, 그리고 곤충들이 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찬양한다. 어제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제의 고됨이 오늘 사라져서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것이 아니었을, 무가 아닌 유로서 존재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대자연이라 부르기도 한 거대한 존재에를 찬양한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 땅 위의 생물들은 신과 마주한다. 복잡한 계산법을 가진 인간만이 이 경외로운 순간을 외면한 채 잠을 자고 있다.
다른 종들의 잠이 인간의 잠과 같다면 이들 또한 잠을 통해 매일 작은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오늘 하루가 즐거웠던 이도, 힘들었던 이도, 누구나 해가 지면 잠과 함께 휴식과 망각의 축복이 주어진다. 낮 시간 동안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오던 감각기관들의 스위치를 내리고 각자의 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그곳은 현실과 차단된 자기 만의 방이다. 세상과 단절되어 나만이 존재한다. 그 방 안에서 우리는 기억의 조각들과 감정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꿈이다. 꿈은 현실과 완전히 차단된 방 속에서 만들어 지는 이유로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꿈을 꾸는 동안에 우리의 뇌는 심지어 감각의 신호마저 만들어 낸다. 장가가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니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이야기는 꿈 뿐만 아니라 실재하는 우리의 삶도 꿈처럼 의식의 연장과 감각의 신호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잠에서 깨면 꿈 속에서 나비였던 '나'도 여지 없이 잠들기 전의 나로 돌아간다. 동물들의 기억은 위험을 피하고 더 나은 먹이을 찾아 내기 위한 생존을 위한 기억이지만 인간의 기억은 이런 동물의 기억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인간은 개별의 사건과 당시의 감정에 연결지어 기억하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들이 잊혀지더라도 지나온 경험들은 차곡 차곡 쌓여 지금의 나의 행동 방식과 반응, 습관과 성격을 만든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처럼 생존 자체에 집중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복잡한 감정 속에 살아가는 이유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유명해져 있었다는 외국의 한 작가도 있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어제의 지옥에서 혹은 어제의 낙원에서 눈을 뜬다. 기억은 항상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이에 기대어 판단하고 행동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몸을 우리의 의식이 올라탄 물리적인 운반체(carrier)라고 생각해왔다. 우리는 몸의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타자인 세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꿈을 꾸듯이 감각기관이 없이도 감각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몸이라는 운반체를 통하지 않고도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깨어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삶의 '경험'이 가능하다. 물론 그 의식이 경험하는 세상이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상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세상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육체의 유한성에 구속 받지 않는 의식을 "영혼"이라 불렀다. 아마도 꿈이라는 공통된 가상현실의 체험이 우리 안에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이 존재하고 영혼은 우리가 죽으면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것 같다. 사후에 천국에 간다던가 지옥에 간다는 믿음, 그리고 죽은 조상이 꿈에 나오거나 귀신이 존재한다는 등의 믿음은 의식의 불멸성,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현대의 과학은 모든 의식과 감정을 뇌신경 세포인 시넵시스와 호르몬의 작용임을 속속 밝혀내었다. 이런 급진적인 과학의 발전은 DNA 사다리와 시냅시스의 세포 하나 하나를 파헤쳐 가며 몸과 의식의 관계를 밝혀내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여전히 육체를 벗어나 존재하고 불멸하는 영혼이란 존재를 믿고 싶어한다. 만약에 영혼과 그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 건너가는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지옥과 천국에 대한 믿음이 존재도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다. 나쁜 놈은 죽은 후에라고 꼭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죽어서라도 보상을 받는다는 지옥과 천국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온갖 악행을 행하고도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리고 살거나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는 부조리가 번번히 목격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도덕이 어떻게 당위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학자들은 과학과 신화의 괴리가 커질 수록 둘 사이에 통합된 하나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브레이크가 들지 않는 기관차처럼 과학은 신과 영혼의 영역까지 속속들이 파헤쳐 모두가 납득할만한 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인류가 지녀온 모든 신화적 가치를 한꺼번에 내던져 버릴 수도 없다는 잘 안다. 때문에 우리는 "과학은 과학대로", "종교는 종교대로"라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해 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 뒷부분에 바로 이어지는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과학이 설명하겠다는 식이다. 실험과 증명이 가능한 합리성의 부분을 과학이 담당하는 대신 도덕과 신앙에 대한 부분은 종교에게 맡기자는 논리이다. 종교는 불합리하다. 아니 합리성의 잣대로 판단될 수 없다.
과학에 의해 종교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에게 주었던 세상에 대한 여러 해석들은 무용하게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인류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필요한 도덕율들을 담고 있으니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믿음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무신론자라고 하여 종교적인 믿음의 바탕에서 출발한 도덕적인 기준을 모두 부정해야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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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이 무용한 논쟁에 스스로 휘말리어 정오가 되어간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일기를 쓰고자 했는 데 일기답게 어제의 일과를 충실히 기록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따라 가다 돌아 보면 한참을 멀리 와 있다. 시작한 글이 깔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거니 긴 글을 쓰고 나서 내가 한 말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된다면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다. 나의 책을 쓰고 싶지만 글 쓰기를 직업으로 가지게 되면 평생 정신적인 소화불량 증세를 안고 살 것 같아 성큼 내키지 않는다.
나는 가끔 아주 잘 팔리는 작가로 유명해지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해 본다. 나이를 불문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작가님 혹은 선생님으로 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취중에 건네는 실없는 농담에도 귀 기울여 주고 혹시 그 안에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을지 한번쯤 곱씹어 줄 것이다. 나는 연이어 베스트 셀러를 출간하고 해외로 내 책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뉴욕 타임즈 같은 곳에 긴 서평이 실리기도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인세만으로도 내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리라.
아마도 작가란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이 이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책들이 서점 한 구석에서 육중한 책들 사이에 낑기어 먼지만 쌓이다가 표지의 색깔이 변할 즈음이면 슬며시 꺼내어져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것이 현실이다. 물론 그런 재미없는 책들 중에 어떤 책들은 작가가 죽은 후 수 년이 지나 그 가치를 인정 받기도 하지만 골방에 쳐박혀 가난하게 살다 죽은 후에 유명해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쨍하게 게인 하늘을 보고 아침을 토스트으로 떼우고 서둘러 해변으로 나왔다. 썬크림을 안바르고 나와 아직도 어깨와 등이 따끔거린다. 수빈이와 수연이는 바다에서 한참을 놀고도 부족하였는 지 단지에 있는 수영장에서 다시 한참을 놀다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구름 위에서 일몰을 보려 하레아카라를 오르기로 했다.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산을 오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에 걸쳐진 구름 속을 지날 때는 짙은 안개 속처럼 앞이 보이지 않아 앞차의 전조등을 따라 올라야 했지만 다행히 구름 보다 높은 곳까지 오르니 다시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이곳 할레아카라(Haleakala) 국립공원은 입장료를 차량 대당 받는다. 차 한 대 당 25불. 정상으로 오르는 찻길은 이미 가까운 주차장이 다 찼는 지 닫혀 있는 탓에 그 아래 주차장에 차를 데어 놓고 한참을 걸어 올라야 했다. 날씨는 겨울처럼 차가와져 자켓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그 위에 다운파커를 입어야 했다. 날씨도 추워지고 꽤나 긴 길을 걸어 올라야 하니 수빈이 수연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말 말 안듣는 대원을 얼르고 달래며 산을 오르는 등반 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할레아카라는 커다란 분화구로 하와이어로 "태양의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아주 먼 옛날 마우이를 통치하였던 반신반인이 이 화산 정상에 서서 지는 태양을 밧줄로 매어 붙들어 하루를 더 길게 만들었다고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큰 덩치의 반신반인 마우이가 떠오른다.
하레아카라 정상에 오르면 마치 화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걸어 오르며 듬성듬성 보이던 풀들도 자취를 감추고 굵은 모래와 바위들만이 땅을 덥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긴 시간 우주 비행 끝에 냉동 수면에서 깨어나 어떤 별에 도착한다면 그 별의 풍경이 바로 이런 풍경일 것만 같다. 지구에서 온 대원들을 이끌로 하레아카라 정상에 올랐을 때 해는 이미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잠시 후 태양은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고 하늘은 아름다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붉은 빛이 조금 가라 앉자 하늘 높이 초승달이 떠올라 운치를 더했다. 오르는 길에 구름이 너무 많이 낀 탓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운 석양을 본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해가 지고 컴컴한 길을 따라 짙은 구름을 뚫고, 신이 사는 곳에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