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2번 출구를 나오면 보이는 작은 가게 창덕호프는 사장이신 큰 이모님과 함께 일하는 작은 이모님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를 거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우리는 언제나 창덕호프에서 모였다. 모임이 없는 날에도 나와 동네 형님은 이른 저녁부터 창덕호프에서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랬다.
가게에 들어서면 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울리며 손님의 입장을 알렸다. 이른 시간에는 안쪽 테이블에서 두 분이 마주 앉아 멸치를 손질하거나 북어를 뜯고 계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계셨으리라. 두 분은 30여 년에 이르는 시간을 이 가게와 함께 했다.
여름 어느 날 큰 이모님이 저기, 하고 말을 건네셨다. 아마 오늘은 꼭 말해야겠다고 작정을 하신 모양이다. 다음 달 6일까지만 영업을 하고, 가게를 정리하고 홍천으로 내려가신다고. 35년을 지켜온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통보 치고는 간결하고 담담한 말씀이셨다. 마치 내일은 사정이 있어 가게문을 못 연다는 말처럼.
내가 안국동에서 청춘을 불사르고 사업을 일군 이 동네 터줏대감을 따라 창덕호프에 드나든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십 수년 전 내가 이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와 지금의 이모님들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 우리가 창덕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스스로 우와 젊었었네 어렸었네 하는 것을 보면 세월은 아주 조금씩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쌓여가는 모양이다.
우리의 창덕에는 항상 신선하고 맛있는 맥주가 있었다. 우리는 창덕의 호프를 100% 신뢰했다. 맥주에 대한 신뢰는 무엇보다 작은 이모님에 대한 신뢰였다. 창덕 호프의 옆에는 서로 연결된 두 동의 건물이 있는 데 지금은 한식박물관과 이태리 식당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들은 이전에는 서울병원이란 병원 건물이었다고 한다. 작은 이모님은 이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이셨다.
맥주를 좋아하는 젊은 간호사는 근무시간이 끝나면 옆 건물에 막 문을 연 호프집에 들러 맥주를 마셨다. 멋쟁이 언니가 차린 작은 가게였다. 몇 년이 지났을까, 낮시간 업무의 스트레스와 저녁 시간 맥주의 천국을 오가던 젊은 간호사는 수고스럽게 건물 사이를 오가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천국으로 출근하기로 하였다. 맥주 오타쿠의 합류. 창덕의 신선한 맥주가 내내 이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이모님은 맥주의 맛에 양보가 없었다. 이모님이 한 번 맛을 보고 신선도가 떨어졌거나 맛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손님 테이블에 올려진 맥주를 모두 회수하고 새 맥주로 바꾸어 놓으셨다. 아 저는 괜찮은데요 하고 아까운 마음에 입으로 가져가도 아니야 안돼하며 잔을 가져가셨다. 그야말로 노빠꾸였다.
창덕호프의 시그니쳐 메뉴는 학꽁치구이와 치킨이었다. 학꽁치구이란 나 같은 서울 촌놈은 이전에 먹어본 적도 없는 안주로 학꽁치를 펴서 말린 포를 구운 것이다. 어느 날 이모님이 일본에 가지고 가라며 학꽁치포를 한 봉지 가득 담아주신 적이 있다. 가게에서 쓰는 재료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고급 제품이었다. 이 학꽁치구이를 청양고추 올라간 마요네즈와 간장소스에 찍어 먹었다. 학꽁치가 테이블에 올라오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맛있는 안주에 형님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덕호프의 간판에 적힌 정식 명칭은 창덕치킨호프이다. 일본에는 간판 메뉴라는 말이 있는 데 그 가게에서 가장 맛있고 잘 나가는 메뉴라는 뜻이다. 간판에 적힌 창덕의 치킨은 그야말로 최강의 메뉴였다. 얇은 옷으로 겉이 바삭하게 속이 촉촉하게 튀겨낸 (겉바속촉의) 치킨은 소위 옛날식 치킨이라고도 하는 데 나는 이 치킨이 서울, 꼭 집어 종로식 치킨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랜차이즈들의 치킨 속에서 아직도 창덕의 치킨을 따라오는 맛을 찾지 못하였다. 이모님은 치킨의 정수는 닭다리에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우리가 가면 꼭 사람 수만큼의 닭다리를 내어주셨다. 우리는 항상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리를 우리에게 몰아주었으니 남은 날개와 가슴살만으로 다른 손님에게 치킨을 내어주지 못하면 어쩌나를 걱정했다.
우리는 자주 골뱅이 소면을 먹었다. 골뱅이반 소면반. 합리적인 가격에 비싼 재료들을 왕창 넣어주는 것. 이것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맛집의 비결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장사의 비결 이전에 이모님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퍼주는 손이 가려면 따뜻한 마음이 먼저 닿아야 한다. 마음이 없는 손은 조막만 하게 오그라든다. 마음이 가면 물에 퍼지는 잉크처럼 한 없이 퍼주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창덕의 기본 안주는 멸치와 땅콩이다. 자리에 앉는 동시에 멸치와 땅콩이 먼저, 그리고 시원한 생맥주가 착! 하고 테이블에 올라온다. 창덕에서는 손님이 무엇이 필요한지 입 밖에 아직 내지 않았는 데 독심술처럼 테이블에 짠! 하고 나타난다. 이모님들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무심한 듯 흐르는 시선에는 손님들의 표정, 테이블의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바로바로 빈 부분을 채운다. 고수들은 손님들과 일심이 된다. 어느 날의 기억은 가게에 들어가 주문이라고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 데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나왔다. 많이 취했는지 아니면 독심술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문 닫기 일주일 전, 창덕에서 닭발을 처음 먹었다. 터주대감은 삼십여 년 간, 나 또한 십수 년 간 메뉴에 있는지도 몰랐던 닭발은 최고의 맛이었다. 한국 남자는 설명서를 읽지 않고 메뉴를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들을 멍청이들!이라 부른다.) 우리는 너무 놀라 일주일 뒤면 사라질 메뉴판을 처음으로 달라 하여 읽어 내려갔다. 하하 이런 메뉴도 있었구나! 항상 세네 종류의 메뉴만 돌려 먹던 멍청이들이 웃는다. 그래도 좋았다. 하나 불만이 없었다.
마지막 날, 초저녁부터 창덕호프의 7개 테이블은 만석을 이루었다. 단 보름 전의 통보였음에도 오랜 시절 이 장소에서 추억을 만들었던 수많은 이들이 마지막 창덕의 모습을 보려, 아니 두 이모님을 만나려 창덕으로 모여들었다. 밖에서 줄을 서 기다리는 오랜 손님들에게 이모님은 반갑다며 인사하고 지금 자리가 없어 미안하다고 또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이곳에 서린 추억들을 이야기하였고 밤새도록 있고 싶어 했지만 밖에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아쉬움을 남기며 일어났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모님 건강하세요. 인사와 인사. 어떤 이들은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도 한참 자리를 떠나지 못해 가게 앞에서 서 있었고 내일이면 사라질 창덕을 여러 장 사진으로 남겼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도 장소도, 사라지며 그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된다.
창덕이 문을 닫고 가게 안팎의 인테리어까지 싹 비워졌다. 테이블도 주방도 다 드러내어도 몇 평 안 되는 아주 작은 가게였다. 이렇게 작은 가게였구나 우리는 이 작은 자리에서 많이도 웃고 울었다. 네모나게 뻥 뚫려 시멘트를 드러낸 자리를 보니 이렇게까지 싹 치워버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울컥, 섭섭함이 몰려왔다. 얼마 후 창덕이 있던 자리에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무인 네 컷 사진관이 들어섰다. 사람이 좋아서 머무르던 자리에 주인이 없는 무인 가게가, 말을 나누던 자리에 조용한 사진관이 들어서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창덕치킨호프(1987~2022). 단지 가게 한 곳이 사라졌을 뿐인데 우리는 길을 잃었다. 아직도 우리는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밤이면 낯선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거리를 배회한다. 엄마 잃은 강아지들처럼 마음 붙일 곳을 찾아 헤맨다.
언젠가는 쓰려했던 소중한 장소에 대한 글이다. 글을 다 쓰기도 전에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는 후회가 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고, 해 놓은 말들은 추억의 디테일을 다 따라가지 못한다. 그 밤, 그 맥주, 그 이야기, 그 사람... 그곳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