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으며
i.
<신영복의 엽서>는 신영복선생이 20년 20일 간의 수감 기간 중에 교도소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를 영인본으로 묶어 낸 책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소주 ‘처음처럼’을 마실 때 언제나 마주하게 되는 선생의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당시의 교도관들은 자신이 무심히 찍은 ‘검열필’ 인장이 선생의 글들과 함께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람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으리라. 더욱이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영국군을 못살게 구는 일본군 같은 역할이라니.
당시 교도소에서는 한달에 한번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그 날이 되면 편지를 쓰려는 수감자들이 길게 줄을 서서 한 명씩 소위 ‘편지 쓰는 방’으로 들어가 교도관 앞에 놓인 책상에서 편지를 썼다. 철필에 잉크를 묻혀 뒤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쫓기듯이 편지를 쓰는 데 이 편지들을 교도관이 읽고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서면 ‘검열필’이란 도장을 찍어 교도소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한 강의(성공회대)에서 이 때 쓴 편지들을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에 쓴 편지와 엽서들을 보면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나 오탈자도 거의 없이 긴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또박또박 적혀 있는 데, 선생은 당시의 환경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는 것이다. 선생의 대답은 ‘머릿속 집필’이었다. 편지에 쓰고 싶은 내용을 떠올리고 한달 내내 완벽한 문장이 될 때까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 고쳐 적고 완벽하게 외운 후에 편지를 적는다는 것이다. 1988년 선생의 출소와 함께 세상에 나온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ii.
글을 쓰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은 역시 ‘읽을 만한 글’을 쓰는 것이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 사이에는 전단지 여러 장이 끼워져 딸려온다. 나는 이 전단지들을 하나씩 들추어 보며 무척 재미있게 읽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관련성 없는 광고들에 폐지만 늘어난다고 짜증을 낼 법하고 환경문제를 들추며 종이신문의 폐지를 사람들에게 전단지란 아주 좋은 딴지거리이다. 전단지처럼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글이라면 쓰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기왕에 글이란 것을 쓰고 있으니) 읽을 만한 글, ‘좀 읽어주십사’ 하는 글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내가 ‘좋은 글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고 그저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독자를 향해 쓰는 글이라면 독자가 자신의 글을 읽는 데 들인 시간과 수고에 보답할 최소한의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정보이던, 감동이던 하다못해 그저 재미라 할지언정 글은 독자가 얻어 갈 것이 있어야 읽을 만한 글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나는 참으로 양심적인 작가이나 동시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나의 독자들에게는 좀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글을 쓰다 보면 금세 글이 어려워지거나 재미없어지게 되기 십상이다. 글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읽는 사람들에게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는 글이 한없이 길어지고 하고자 하는 말이 중구난방에 이른다. 작가의 공력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얼마나 간결하고 재미있게 쓰는가에 달렸다. 훌륭한 작가는 어려운 내용을 ‘스무스(smooth)하게’ 풀어내고 고수는 가벼운 펀치로 상대를 제압한다.
다시 신영복선생이 옥중에서 쓴 글들을 펼쳐본다. ‘머릿속 집필’을 거치어 세상에 나온 선생의 글은 단어 하나의 쓰임에도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 낸 ‘단단한 글’들이다. 부드럽지만 명료하고 묵직하지만 경쾌하다. 언젠가는 선생처럼 깊은 지식과 넓은 통찰을 가지고, 털어도 털어도 허투루 쓰인 조사 하나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글들을 쓸 수 있기를. 지금부터 글 쓰는 시간에 기도를 올리거나 세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지니가 갇혀있는 요술램프를 찾아 나서는 것이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