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므살 여름 혼자서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떠났다. 내 목에는 가지고 당시에는 최신이었던 리모컨이 달린 일제 카메라가 걸려 있었고 배낭에는 하드 커버로 된 빨강 다이어리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사진 속에 오래오래 가두어 두기 위하여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렀다. 하지만 정말 마음이 드는 풍경이 펼쳐지면 가만히 앉아 빨강 다이어리 노트에 그 풍경을 스케치하고 나의 느낌들을 글로 적었다.
한달 반의 유럽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여행 중 찍은 수십통의 필름을 들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그동안에 카메라에 담아 놓은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생생하게 꺼내 볼 수 있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동안 찍은 수백장의 사진들은 대부분은 빛에 노출되어 하얀 백지로 나왔고 단 몇 장만의 사진이 재대로 현상되었다. 내가 가지고 간 그 최신의 카메라는 떠날 때부터 고장이었는 지 일정의 초반부터 실종된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유럽을 돌며 보고 경험한 것들을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자랑하려했던 나는 크게 낙담하였다. 사십여일 간 내 앞에 펼쳐졌던 아름다운 풍경들과 추억들이 사진들과 함께 내 머릿속에서도 하얗게 지워져 버린 느낌이었다.
스므해가 더 지난 지금, 나는 그 당시 찍은 사진 중 운 좋게 살아남은 몇 장의 사진을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남아있는 사진 보다 훨씬 더 많은 추억을 당시 가져간 빨강 다이어리 속 글과 그림을 꺼내어 보며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사진 속 피사된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쓴 글과 그림을 다시 꺼내어 보며그 글과 그림을 적어 내려 가던 그 시절의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노트 안에는 당시 멈추어 서서 그렸던 풍경들과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그들과의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절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이어리를 읽다 보면 어느 새 나는 그 다이어리를 적고 있는 스므살의 나로 돌아와 있다.
공항에 도착하여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잦은 출장을 떠나는 아들에게 오가며 보고 느낀 것들을 잘 메모하면 좋은 추억이 될 거라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많은 데 꾸준히 써내려 가지 못하는 것을 자책하던 나는 뜨끔하였다. 나는 나의 삷 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과의 만남, 그 사이에 느낀 것들이 잃어버린 사진 속 장면들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 지금의 ‘나’를 추억 속에 잡아 두고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다시 불러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비행기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