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연 Oct 13. 2021

영원히 기억할 곡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수연아, 엄마 병원이야. 팔이 부러졌어.

집도 아닌 어느 낯선 화장실에서 발이 미끄러져 손목뼈가 나갔단다. 인대가 부은 거라며 깁스도 해주지 않은 병원 덕에 고생은 배가 되었다. 점점 부어오르는 손이 심상치 않아 옮긴 다른 병원에서는 혀를 찼다. '뼈가 작살이 났는데 무슨 소리랍니까' 하며. 제 잘못도 아닌데 주눅이 든 엄마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입원실에 곧장 입원을 했다.


옷가지와 생필품, 박카스 한 상자를 끌어안고 병실 침대에 걸터앉은 나에게 엄마는, 의사가 생각보다 오래 입원을 권했다고 말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한가득 서려있었다. 집을 비우기엔 너무 긴 시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같은 입원실을 쓰는 아주머니들에게 박카스를 돌리며 (아휴, 역시 딸이 최고네 하는 리액션에 간간히 웃으며) 대꾸했다. 의사가 있으라면 있어야지.


집으로 돌아가니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강아지를 안아주고 간식을 먹이고 배변패드를 갈아주었다. 그리고 배달 음식 하나를 시켰다. 멀쩡한 식탁을 두고 안방 바닥에 작은 상을 펴놓고 밥을 먹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원체 좌식을 못해 다리가 저렸으나 다리 위에 올라와 앉은 강아지를 밀어내지도 않고 열심히 수저질을 했다. 나답지 않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해가 질 즈음,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터진 건 폭죽이 아니라 주방 천장의 수도관이다. 졸졸졸이 아닌 콸콸콸. 적어도 내 집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던 실내 폭포. 강아지는 놀라 이불속으로 숨었고, 나는 입을 북어처럼 쩍 벌린 채 허공의 곡선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식탁에서 밥 안 먹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나는 지금 미역 줄기 같은 모습으로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으리라. 넋 나간 뺨을 몇 대 치고, 수도 공사를 하러 몇 번 다녀갔던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우선 윗집의 수도 밸브를 잠그라고 했다. 어, 윗집 수도 밸브가 어디 있나요. 아가씨 집 수도 밸브랑 똑같은 자리에 있겠지. 그럼 저희 집 수도 밸브는 어디 있나요. 바보 같은 소리를 잔뜩 뱉으며 어찌어찌 밸브를 잠갔으나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은 밤이 늦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이대로라면 내일 동이 트기 전에 집이 꼴까닥 잠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상황과 다르게 마음은 무덤덤했다. 엄마는 병원에 있다. 앞으로 몇 주 더 있을 것이다. 나는 내일 당장 출근을 해야 하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유지하며 강아지를 돌봐야 한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넘어가지만 괜찮다. 이직을 준비 중이어서 밤새 시험 준비를 해야 하지만 괜찮다. 모든 것을 똑바로 컨트롤하려면 나는 지금 괜찮아야만 한다. 사실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괜찮아야 하는 시기에 고삐를 조이는 일이 처음인 건 아니었으니 그마저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H가 실내 폭포 앞에서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서있던 건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새벽이었다. 입사 첫 해였던 데다가 일이 아주 바빠 하루에 서너 시간을 겨우 자며 일하던 시기였다. 어제도 몇 시간 못 잤잖아. 정말 괜찮아, 오지 마. 정색을 하고 거절하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나는 눈앞의 그를 보며 깊이 안도했다. 사실은 손가락 하나라도 의지할 수 있다면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오락가락하는 물줄기 앞에서 H는 나를 토닥이며 괜찮을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위로해주다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잠든 그의 곁에 강아지가 쭐래쭐래 올라가 몸을 기댔다. 새벽 세 시, 혹은 네 시. 깊은 잠에 빠질수록 두 생명체의 자세가 우스운 모양으로 흐트러졌다. 그 모습을 문간에 서서 바라보며 나는 킬킬거렸다. 년 전의 일이다.






'결혼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는 오랜 시간 나의 관심사였다. 브런치에도 두 편의 글을 적었더랬다. 2016년, 기혼자들의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며 적은 첫 글의 한 문단은 이렇다.


꽤 많은 연애 끝에 내가 정의한 운명은, 가장 좋은 타이밍에 만나서ㅡ어느 한쪽이 집착하는 사람이 되거나 혹은 무심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ㅡ비슷한 무게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의 정의는 살아보지 않고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듯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처럼 결혼 이후의 삶을 궁금해하는 어느 미혼 처녀는 이렇게 점점 더 확고한 결론에 다다른다.

아, 모르겠다.


한 해가 더 지나고 적은 두 번째 글의 한 문단은 이렇다.


내가 이 시기를 거치며 또렷하게 깨달은 두 가지는, 인간과 확신이라는 두 단어의 부조화였다. 무언가에 대한 '확신'은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과거에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명제 중 지금도 유효한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음, 그렇군 하고 가볍게 인정하게 됐다. 결국 사랑을 유지한다는 건 끊임없는 노력으로 순간의 확신을 재생산해야 하는 것이라, 나는 결론을 내렸다.


H는 첫 글과 두 번째 글 사이 언젠가, 내 삶에 등장했다. 그가 등장한 이후에도 결혼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기혼자들의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른다. 결혼에 대한 확신 같은 건 없을지도. 그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간증 같은 것일지도.


청첩장의 한 귀퉁이


2022년 2월, H와 나는 부부가 되었다. 청첩장 문구 쓰기가 신춘문예 투고작 쓰기 보다도 어려워 예시글을 붙여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평생 뭐라도 쓰는 게 꿈이라 말하는 인간으로서 이건 경우가 아니다 싶어 마음을 다잡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뻔한 구절들만 한 가득. 한참이 지나도 신선한 문장은 토씨 하나 떠오르지 않아, 재료 좀 줘보라며 도움을 요청하니 H는 공무원 학원 강사 같은 말투로 말했다. 자, 우리가 왜 결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랑 결혼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기가 먼저 얘기해 봐.

...

청첩장 문구 쓰기가 어려워 도움을 요청했더니 더 어려운 질문을 준다. 그걸 그리 간단명료하게 '응,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너랑 결혼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관계라면 그 결혼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결혼의 이유를 생각하면 단어가 아닌 상황이 떠오른다. 로맨스와 로맨스릴러가 그라데이션으로 뒤엉켜 떠오른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허공을 가르고 떨어지는 곡선의 물줄기다.


연애를 하면 고정적으로 반복되는 생각들이 있다. 교집합에 대한 감격이라거나 조정이 되는 않는 부분에 대한 염려라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라거나. 하지만 천장에서 물이 새던 그날, 나는 잠든 H와 나의 개를 보며 킬킬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낯선 무언가에 사로잡혔다. 아주 어색하고 명료한 감정 안에 오래 서 있었다. 그건 하나의 문장이었다.


나는 영원히 오늘을 기억하겠구나.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거기엔 어떠한 이벤트적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우리의 지난날이 바래질 때에,

진저리 나도록 그를 사랑하고 미워할 때에,

세월의 흐름에 모든 것이 무력하고도 가치롭다 여겨질 때에,

그 모든 순간에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보다는 예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새벽의 공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결혼에 대한 확신은 어디서 얻나요.

2016년의 나처럼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대꾸할 말이 없다. 여전히 모르니까.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확신을 받은 적이 없는데 확신이 있다는 이상한 말 뿐이다. 그 확신은 안타깝게도 결혼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내가 나의 운명의 길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다는 확신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