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는 것은 그만큼의 새로운 언어를 만난다는 의미다. 낯선 단어와 줄임말과 기존과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 언어를 제대로이해할수록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진다. 숙제가 과제로 바뀌는 대학 시절이 그렇고 선배님이 사수님으로 바뀌는 직장 생활이 그렇다. 그리고 '촬드 가봉'이 '촬영용 드레스 대여섯 벌을 입어보고 그중 세 벌을 고르러 가는 일'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다음 사항으로 진행이 가능했던 결혼 준비가 그랬다. 가봉의 사전적 의미와 아무런 연관 없이 가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최근 일본에서는 소박한 결혼식이라는 의미의 지미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결혼식보다는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 혼인신고만으로 결혼 절차를 끝내는 부부들도 많아지고 있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결혼식에 소모되는 돈과 시간은 물론, '누가 우리를 진정으로 축하해줄 것인가'에 대한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한몫을 한다. 적당한 개인주의가 미덕인 시대 가운데 결혼식을 간소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무래도 국가를 불문한 흐름인 듯싶다.
나는 결혼식에 원하는 것이 확고했다. 200명 이하의 하객을 수용할 아담한 홀. 동시간대에 한 쌍의 부부만 식을 진행하는 곳. 노출이 적고 반짝이는 드레스. 전염병이 도는 시국이니만큼 개별로 진행되는 코스 요리를 원했다. 그런 것들은 정보를 많이 알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 결혼 관계자들에게 잘 전달하면 무탈하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웨딩 베뉴는 단독홀로 원하는데 워킹으로 진행할 예정이라 드메만 체크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해석 : 결혼식장은 동시간대에 한 팀만 진행하는 곳으로 하고 싶은데 플래너랑 계약하지 않고 저희가 직접 상담 다니며 계약할 예정이라 드레스랑 메이크업 계약만 도와주시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보이는 것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더 깊숙한 부분. 개인의 신념에 대한 부분은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이어야만 했다. 스스로 번민하고 타협하고 심사숙고하여 내린 선택지를 타인에게 정확히 이행해달라 요구해야 했다. 내가 유일하게 모시고 싶었던 주례 선생님은 몇 년 전 선교와 봉사를 위해 캄보디아로 떠났다. 그분이 아니라면 주례는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모녀 가정으로 자라 아버지의 자리가 비었지만 흔히 봐온 예식들처럼 신부의 옆자리와 혼주석을 남자 친척으로 메우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이 어떠냐는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마뜩잖았다. 나는 아버지의 소유에서 남편의 소유로 넘겨지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고 그 시작이 어머니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우리가 독립적인 주체로서 상대를 선택했다는 의미가 강했으면 싶었다. 결국 나는 활짝 열리는 웨딩홀 문 앞에 홀로 섰다. 부케를 든 신랑이 걸어오는 나를 마중 나왔다. 무릎을 꿇고 부케를 내미는 H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헤벌쭉 웃는 내 모습이 사진과 영상에 전부 찍혔다. 상당히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자연스러웠다. 신부측 혼주석에 의자를 하나만 놓아달라는 요청은 흔치 않은 일이라 예식장에 여러 번 당부를 해야 했다. 원판 사진 촬영을 위한 준비를 다 마치고도 작가에게 '신부 직계 가족들 어디 가셨어요. 얼른 앞으로 나오세요'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이 정도는 가볍게 넘길만한 해프닝이었다.
신부대기실로 가는 길
여의도의 한 예식장에 상담을 갔을 적, 어느 예비부부와 아주머니를 보았다. 아주머니는 안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 이름을 뭐하러 물어보냐고요. 상담을 먼저 하고 계약할 생각이 있으면 그때 알려준다니까.' 안내 직원은 성함을 알려주지 않으시면 상담 진행이 어렵다 말했으나 아주머니는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고 예비 신랑 신부는 목청이 큰 아주머니 뒤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저 사람이 둘 중 누구의 어머니일지 추리를 펼치며 대기하다가 상담실로 불려 들어갔다.
'결혼은 부모님 잔치'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부모님이 살아가며 뿌린 축의금을 거두어야 하는 잔치이며 신랑 신부의 지인보다 부모님의 손님이 더 많이 오는 잔치. 그렇기에 부부의 의견보다는 부모의 의견을 따라 결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식장을 어느 지역에 잡을지. 어느 정도의 규모와 어떤 식사를 제공하는 예식장을 잡을지. 청첩장에 계좌 번호를 넣을 것인지. 주례는 누가 진행할지. 드레스의 노출 여부와 들어온 축의금 중 식대를 제외한 잔금이 누구의 소유가 되는지까지 가족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수렴해야 한다.
우리가 결혼식의 제반 사항을 뜻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양가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너희 결혼식이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양가 부모님의 입장도 한몫을 했다. 삼십 대의 예비부부가 든든한 돈뭉치를 쥐고 있을 리 무방했지만 가능한 선에서 준비하고 나머지는 미래의 우리에게 떠넘겼다. 하객의 비율도 친척 3 신랑 신부의 지인 7 정도로 진행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자영업을 하셨기에 본인 손님이 많지 않았으며, H 역시 본가가 먼 데다가 차남이었기에 신부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능했다. 부모님의 잔치가 아니었기에. 우리의 결혼식이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가 우리의 선택이었던 만큼 우리는 온전히 축복받은 기분을 누릴 수 있었고 성취감에 한껏 고취될 수 있었다.
특별한 결혼식의 대명사 격인 영화 '어바웃 타임'의 예식 장면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적다. 하늘색 정장을 입은 팀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메리. 팀이 좋아하는 음악 Il mondo와 파티장을 깡그리 날려버린 세찬 비바람. 화면이 넘어가고 빗물에 쫄딱 젖어 실내에 앉아있는 손님들에게 신랑 팀의 아버지는 가슴 뭉클한 축사를 들려준다. 그중의 한 구절은 이렇다.
결혼하는 사람에게 전 항상 한 가지만 충고합니다. 끝엔 우리 모두 다 비슷하거든요. 모두 늙고 같은 얘기를 수십 번씩 반복하니까요. 그러니 상냥한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 아들 팀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상냥한 남자이고요.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이에 부합한다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결혼식인들 낭만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혼식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선택한 상냥한 사람을 소개하고 독립적인 가정의 시작을 맹세하는 자리다. 타인의 결혼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식사라고 한다. 하지만 하객일 때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식사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게 있었다. 그건 부부의 분위기였다. 행진곡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친구가 어떤 얼굴로 그 길을 걸었는지는 기억한다. 신부의 부케 색깔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케로 입을 가리고 웃던 모습은 기억한다. 무엇보다 부부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결혼을 준비할 적 우리에게 '적당한 미소를 유지해야 사진이 예쁘게 나온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고로 우리는 결혼이 끝난 이후에 '신랑 신부 잇몸 다 말랐을 것 같은데 괜찮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건 우리 결혼식 사진 중 건질 것이 많이 사라졌다는 뜻이었지만 또한 모든 것이 유쾌하게 진행되었다는 의미였다. 호화로운 예식도 격조 높은 예식도 아니었지만 기쁨만은 한껏 자랑한 결혼식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H의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 정말 잘 살려나보다. 밖에 눈이 펑펑 오는 걸 보니.'
정말 아치형 창문 밖으로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가볍게 날리는 눈처럼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래 준비한 하루가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온전히 그 하루를 살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