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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Aug 17. 2022

살랑살랑 산책을

산책을 좋아한다. 개와 보폭을 맞추어 걷는 것도, 혼자서 사색을 즐기며 걷는 것도 즐겁다. 결혼을 한 이후로 남편과 걷는 날이 잦아졌다. 이어폰이나 배변 봉투를 챙길 필요가 없어 몸이 가볍다. 핸드폰만 달랑 주머니에 넣고 맞닿은 쪽으로는 손을 잡는다. 여름엔 살이 끈적하여, 겨울엔 두툼한 옷에 움직임이 둔하여 늘 손을 잡는 편을 택한다. 팔짱보다는 그쪽이 좋다. 갑갑한 것에 질색을 하는 성격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보통은 1km 남짓을 걷는다. 자주 가는 망원동의 카페는 집에서부터 정확히 900m 떨어져 있다. 느릿느릿 걸어간 후 커피를 쥔 채 다시 느릿느릿 걸어오면 삼사십 분이 소요된다. 운이 좋으면 카페에서 돌봐주는 길고양이를 만나거나 사장님으로부터 서비스 쿠키를 받는다. 홀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운다. 사장님은 우리 부부가 고양이를 키우는지 모르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 일방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는 우리는 강한 연대 의식을 느끼며 자꾸만 그곳을 찾는다.




혼자 걷는 일은 흔하다. 따로 시간을 내어 걷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퇴근 시간 자체가 사색의 시간이 되는 일이 잦다. 늦은 출근과 늦은 퇴근 덕분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밤 11시 전후의 퇴근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된다. 자정의 주택가는 고요하고 으슥하다. 위험을 방지하려 이어폰을 멀리한 이후로 퇴근길의 막바지는 자연스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되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하지만 타인과 걷는 일은 흔치 않았다. 걷기를 위한 걷기는 더욱, 특정한 사람과의 반복되는 산책은 더더욱 그렇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손꼽는 책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은 아티스트 웨이 두 번째 시리즈의 모든 챕터를 '듣기'로 채웠다. 모든 소리를 듣는 법. 타인의 말을 듣는 법. 내 안의 소리를 듣는 법. 고요함 그 자체를 듣는 법. 그와 더불어 저자는 말한다.


'듣기 위하여 걸으라.'


걷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는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 많은 이들은 오늘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 걷고 있다. 홀로 걷는 것이 성찰을 위한 일이라면 함께 걷는 것은 관계를 위한 일이다. 줄리아 카메론은 '함께 걷는 것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게 한다' 말한다. 매 걸음이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고, 매 걸음이 호흡을 요구하기에 함께 걷는 이들은 서로에게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함께 걸은 만큼 서로의 중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난주 서울에는 큰 비가 내렸다. 강남과 관악 일대가 침수되었다. 며칠을 꼼짝 못 하다가 오랜만에 나간 산책길에도 부슬비가 내렸다. 잠겼던 개천 인도는 조금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통제되었다. 비로 인해 모조리 꺾인 꽃가지과 엉망이 된 흙더미들을 스쳐 골목길을 걸었다. 사차선 도로 중 세 개 차선이 침수되어 비가 덜 고인 하나의 차선으로 겨우 끼어들어 살아남았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이라고. 다행이라는 말로 끝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골목길 모서리를 돌 때 비를 피해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의 궁둥이를 열심히 쫒아가 들고 있던 간식을 먹이고 되돌아 걸을 즈음 비가 그쳤다. 우리 고양이도 그때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저렇게 지내고 있겠지. 아니 이미 이 세상 고양이가 아니겠지. 그렇게 아팠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뛰쳐나온 개들이 곁을 스쳤다. 네 발이 온통 까무족족했다. 긴 장마 기간 동안 산책을 못해 갑갑했을 것이다. 귀엽다. 그러게. 집에 가서 뭐할 거야. 운동.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씻고 누워서 시간 죽이고 싶다. 안돼.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안돼. 글 써. 아우 압박이나 주고 부담스러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럼 아무것도 하기 싫음에 대해서 글 써. 나는 한숨을 쉰다. 기계를 정리하려는 단골 카페의 문을 슬며시 열고 영업 끝났나요 물어보니 괜찮으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페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감격스럽도록 시원했다.


커피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우리도 세상에 더 다정한 사람들일 수 있을까.

다정하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우리만은 끝내 다정한 사람들이면 좋겠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처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남편을 만나고 스물네 번의 계절을 함께 걸었다. 모든 계절을 겪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진실해졌을까. 연인의 산책과 부부의 산책 사이에 무엇이 달라진 걸까. 사실은 모르겠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의 산책이 점점 더 편안해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정해진 자리에 서서 비슷한 보폭의 걸음을 훈련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점점 한 몸 같아지고 있다. 함께 걸으며 매 순간 호흡을 나눈다는 줄리아 카메론의 이야기는 어쩌면 두 사람의 호흡이 하나의 호흡처럼 닮아간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야'라는 질문에 '너는 또 다른 나야'라고 대답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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