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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May 30. 2022

우리의 목소리는 살았고 바람은 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가 말했다. '지않게 퇴근할 수 있으니 같이 좋은 데 가서 저녁 먹자.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얼른 마무리하고 갈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별 다른 일정도 없었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일을 하고 나는 내 시간을 누리고 있으면 된다.


낯선 동네였다. 나는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카페에 도착해 창가 자리에 앉았다. 번화한 위치가 아니었던지라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내부는 한적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를 켜고 이어폰을 꽂았다. 주드 로의 딸들과 카메론 디아즈가 레이스 텐트 속에 누워 화장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그 장면에서는 언제나처럼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화면이 어두워지자 액정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볼까 소스라치며 얼른 표정을 바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을 마친 그가 카페에 도착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와 나는 어딘가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홀로 앉아있던 카페, 로맨틱 홀리데이와 한적했던 실내의 모습에서 끝이 났다. 이후의 기억은 없다. 그와의 연애는 일 년을 채우지 못한 채 끝이 났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기록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것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늘 다이어리를 쓰고 달력에 세세한 일정을 적어둔다. 핸드폰 잠금 패턴을 풀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면은 해야 할 일 리스트의 위젯이다. 거기엔 개와 고양이의 외부 기생충 접종일이나 미용실 예약 시간이나 눈찜질을 하고 손톱 손질을 하라는 명령조의 문장이나 싸이월드에 사진첩이 복원되었는지 확인해 보라는 등등의 메모가 적혀 있다. 미래에 대한 실수는 기록으로 제어가 가능하고 나는 그것에 아주 능숙하다. 하지만 과거는 다르다. 평범함으로 치부된 일은 대부분 없었던 일이 된다.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의 기억에는 있으나 나는 모르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화제에 오른다. 어휴 너는 어쩜, 하는 소리와 함께 구박 또 구박.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평범한 일상이 자연스레 사라지도록 두는 것. 그것이 딱히 아쉽지 않았다고 하면 너무 오만한 말일까.


얼마 전 배우 박보영이 나온 예능의 짧은 토막을 보았다. '늘 일기는 쓰는 배우'라는 타이틀에 홀리듯 눌러본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MC는 그녀에게 물었다. 가장 오랜 시간 간직하고 싶은 일기장의 페이지는 어느 것이냐고.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보통의 하루. 화날 일도 슬퍼할 일도 고민도 없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날을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MC는 찡한 얼굴로 동의를 표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평범한 날들의 기억이 아쉬워진 건 H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는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부터 우리의 날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여행지였다. 그가 찍은 직사각형 화면 속의 나는 익숙한 옷을 입고 익숙한 가방을 메었으나 내가 잘 모르는 얼굴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하는 와인을 마신 후 술주정을 하거나 이름 모를 식당에 앉아 식탁 위의 지글지글한 요리를 보고 있거나 어느 귀여운 것을 봐야겠다며 거리를 뛰어가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 찍은 영상의 주인공은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인 듯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목소리는 살았고 바람은 불었다. 모든 영상에 그날의 냄새와 에너지가 담겼다. 그날의 기운. 그날의 분위기.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몸속으로 사그라드는 그날의 공기. 그렇게 소소한 하루하루가 나의 클라우드 속에 차곡차곡 담겼다.




나는 '너와' 함께 하는 게 중요한데 너는 나랑 '뭘'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며 화를 내던 사람이 있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을수록 나는 기가 죽었다. 나란히 앉아 숨만 쉬어도 즐거워야 하는 건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도 '뭘 하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나의 모습이 그리 보였을지 모르겠다고 추측할 뿐이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와 내가 서로에게 그런 감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그가 나의 성향을 비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그건 '너와 내가 하는 것이 사랑이 맞는가'에 대한 다른 방식의 물음이었다.



'함께 성장하는 관계'라는 말의 '성장'이 경제력과 커리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로가 몰랐던 '세상의 귀한 것'을 알려주는 관계. 그런 말랑한 개념도 포함된다. 내가 H에게 알려준 말랑함의 대명사는 단연 고양이다. 정확히는 '고양이의 혼을 쏙 빼놓는 어마어마한 사랑스러움'을 알려주었다. 그 방면에서 그는 단기간 최고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 역시 H에게 고양이만큼이나 귀하고 말랑한 것을 받았다.


기억.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하루'를 받았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며 순간적으로 느끼는 찰나의 감정들이 있다. 예상치 못하게 받은 기분 좋은 연락. 잘 풀린 회의. 유달리 여유로운 점심시간. 창 밖으로 마주한 파란 하늘. 행복이고 기쁨이며 감사인 것들. 더 많이 찾아낼수록 유리한 보물찾기 같은 것. '보통의 하루'는 그런 것이었다. 시작이자 마지막이었으며 특별함이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모든 것이었다.


H가 남긴 영상 속에는 나 혼자만 담긴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함께 담겼다. 나의 목소리는 자주 어리둥절하고 들떴으나 H의 목소리는 대개 조근조근하고 둥글었다. 귀하다, 귀하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스러운 순간을 잊지 않고 돌려볼 수 있다니. 결혼 생활을 하며 가벼운 트러블이 생겨도 지난 영상 하나에 마음이 녹는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반성하게 된다. 보통의 하루가 보통의 하루를 보듬는다.


디지털 포맷처럼 간단하게 날려버린 과거의 일상들이 아쉬운 날도 있지만 지나간 일을 생각하다 보면 나의 현저하게 떨어지는 기억력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세상만사 모든 것이 고민스러워져 아쉬움 같은 건 어디에도 남기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우리의 영상은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고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을 추억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두 사람의 삶이 담겼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했을 많은 생명들의 삶이 뒤엉켜 담길 것이다. 그 모든 순간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살아 있고 바람은 불 것이니,  

아,  

미소 짓지 않을 이유가 없는 보통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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