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부와 모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가난에 허덕이던 엄마가 아빠에게 나를 보내고 아빠의 새 가정에 끼어 살다가 다시 엄마가 돌아오기까지 삼 년이 걸렸다.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의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불운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사정이 있었으나 아이는 그런 것은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것이 유일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불확실해졌으며 어른이 가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 아이는 '어쩌면 내 탓일까' 추측하고 기가 죽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의 불운에서 벗어나는 일은 청소년기에 자연스레 진행되었다. 아버지를 갖지 못하여 생긴 불운보다, 아버지를 가지고 있기에 생기는 불운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변인들을 통해 알게 된 순간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없어서 슬펐던 순간과 아버지가 없어서 다행이었던 순간의 횟수가 점점 균등해졌다. 1등을 하던 친구가 3등을 했다는 이유로 귀싸대기를 맞던 날. 그 앙칼진 소리가 아파트 복도를 쩌렁쩌렁 울린 날. 친구를 북어 패듯 후드려 패는 친구의 아버지를 112에 신고하던 날. 나는 완전히 불운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똑같이 불운했으므로 아무도 불운하지 않았다.
2022년, 첫 아이를 유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불운했다. 아이를 욕심낸 적은 없었다. 딩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아이는 찾아왔고 떠났다. 이미 깊이 새겨진 흔적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졌으나 나 혼자만 '불운한 결과'를 마주했다는 이유로 나는 부도덕한 인간이 되었다. 축하해야 마땅한 일에 축하할 수 없는 마음. 모두가 상대를 축하할 때 마뜩잖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이 나 자신에게 상처가 되었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어느 날의 나는 불운했다. 나의 불운은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고 타인의 불운은 다시 나의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운수 대통한 인간이었던 어느 날, 나는 누군가의 불운 유발자였을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의 마음 가운데에, 소리 소문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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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균형을 이루어 움직인다는 신념을 오래 품고 살아왔다. 운과 불운의 반복은 개념적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무엇이 반복되든 비뚤어진 레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일어나는 사건 앞에 한낱 인간은 무력했고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인간의 고민에 답이 있을 리 없다.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삶의 희비극까지 대범하고 명랑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상을 꿈꾸었으나 실패. 완벽한 실패였다.
어린 시절, 나의 불운은 타인의 불운으로 약분되었다. 부재하는 아버지 위에 폭력적인 아버지를 두고 작대기를 찍찍 그으면 0이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런 방식이면 되는 걸까. 그렇게 모든 것을 0으로 만들면 되는 걸까. 세상을둘러보면 말이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모든 인간에게 탑재된 기본 옵션같았다. 한남동 유앤빌리지를 바라볼 때불행했던 인간은 달동네 쪽방을 보며 안도했다. 자신의 아이가 받아온 90점 시험지는 옆집 아이의 95점 시험지로 약분되었다. 불운은 불운으로. 운은 운으로. 기쁨은 사라지고 '0이라는 이름의 안도'만이 남는 사회의 규칙이 낯설지 않았다. 그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몸서리치며 식탁을 제단 삼아 고해하던 날,
H는 말했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 그렇다고 당신이 타인의 불운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 건 아니잖아. 그럼 된 거야.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에게 실망했다는 점에서 당신은 이미 한 만큼 한 거니까 괜찮아. 이제 그냥, 더 나은 사람이 되어버리자."
신학자이자 작가인 유진 피터슨은 저서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말한다.
'인내는 그들이 가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무조건 견뎌 내면서 세월이 흘러도 판에 박힌 듯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스스로를 사람들이 신발에 묻은 흙먼지나 털고 가는 발깔개로 취급하는 체념의 상태가 아니다. 필사적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서 능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략) 인내는 의기양양하고 생동적인 것이다.'
많은 것을 쟁취하고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답은 아니었으나 부족한 해석이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 필요했다. 타인보다 높은 곳이 아니라 '지난날의 나를 누르고 현재의 내가 더 우위에 섰다'는 느낌. 그것이 간절했으나 어째서인지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로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소아정신의학과 의사인 지나영은 자율신경계 장애로 갑자기 삶이 멈추게 된 시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억울하고 속상한 시기를 겪었고 여전히 온전한 회복은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 동안 배우고 깨닫고 성장한 것이 너무 많기에 아프기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운한 시기를 겪은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지나영 작가의 강연 영상에는 '거 짓 말'이라는 세 글자 댓글이 달렸단다. 정말 거짓말일까. 그 많은 이들이 그저 정신 승리 중인 걸까. 자기 최면을 위하여 구호처럼 내뱉는 말인 걸까.
좋은 글을 읽다가 경외감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미묘한 마음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문장이 등장할 때에 대개 그렇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했으나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추상을 글로 완벽하게 형상화시킨 작가들을 보면 태초의 신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한다. 같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어도 껍데기만 잔뜩 핥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로의 마음을 파내다 파내다 못해 온전치 않았던 생각까지 끄집어 내어 명확하게 다듬는 사람이 있다. 전자와는 대개 타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후자와는 '나'의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이야기. 경중을 떠난 불운의 이야기. 불운한 시기를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자신이 얻어낸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로 인해 어떻게 과거의 자신을 딛고 올라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평온한 일상의 날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 순간 서로의 말과 들음 가운데에는 '지혜'가 떠다닌다. 손을 뻗어 빠르게 낚아채는 사람이 승자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에 대한 경외감이 상대의 얼굴에도 어린다.
인간은 마음먹은 만큼 성장한다. 방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깊숙한 성장은 단연 연단이다. 鍊鍛. '달굴 연'에 '두드릴 단'. 쇠붙이를 불에 달구고 두드려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불운한 시기에 인내하는 것. 발깔개처럼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생동적으로 의기양양하게 인내하는 것. 그리하여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추상을 지혜로 형상화하고 낚아채는 것. 완벽하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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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한 삶이란 없다. 불운한 인간도 없다. 정말로 세상은 균형을 이루어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도 가끔 마음이 옥죄어드는 순간이 있다. 운의 반복은 불안하고 불운의 반복은 힘겹다. 자연스레 있으면 타자의 불운을 끌어다가 나의 불운을 약분하게 된다. 나는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14년, 유진 피터슨 작가를 알았고 그의 글에서 많은 삶의 무기를 얻었다. 그중에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위에 언급했다. 의기양양하고 생동적인 인내. 사람은 불행하다 느낄 때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비교를 통해 불행을 강화한다. 타인의 합격. 취업. 결혼. 임신. 출산. 이사. 여행. 모든 것이 불행의 시발점이 된다. 그런 마음이 모락모락 올라올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 비교하고 있어. 축하가 전혀 되질 않아. 내 그릇이 이렇게 간장 종지 같다니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스럽네.' 그 모든 과정을 입 밖으로 뱉는다. 예전에는 글로 썼다. 지금은 H에게 말로 뱉는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 짓밟아버린다. 절구 속의 마늘처럼 갈고 찢고 빻아서 끝장내 버린다. 그리고는 실제의 내 마음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의 좋은 날을 기원한다. 입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어떻게든. 나는 적극적으로 인내했고, 누군가의 것으로 내 것을 약분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살아왔던 모든 순간의 나보다 가장 우위에 선다. 실망스러웠던 과거의 나는 죽었다.
좋은 것만 있는 삶.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삶을 나에게 준다고 해도, 거짓말 같겠지만, 나는 사양할 것이다. 무슨 재미가 있겠나.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인생 따위가.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불운한 삶'이라는 팻말을 걸고 공들여 집을 지었던 나 자신이었다. '이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시기인가봐' 확정하며 틀을 씌우면 불행해졌다. 상추를 심은 곳에는 상추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서, 신은 말한다.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 세상을 어떤 두려움에서 구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불운이 뭔지조차 모른다. 지금 겪는 불운이 우리의 삶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역시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불운이란 실존하지 않으나 모양새만 갖춘, 그런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든다. 마치 '완벽'이라는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