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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연 Aug 30. 2022

1cm의 아기를 보내며

2022년 7월 13일.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수요일이었다.


나와 H는 이른 오전 산부인과 진료실에 앉아있었다. 네 번째 방문이었다. 지난번 진료에 담당 의사는 '2주 후에는 아기의 팔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기는 매우 빨리 자랐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4주 3일 차에 0.48cm 아기집을 확인했고 5주 4일 차에 106 bpm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는 7주 2일 차가 되자 146 bpm으로 빨라졌다. 같은 날 아기의 탯줄을 확인했고 머리와 몸통이 구분된 것을 보았다. 그리고 9주 차의 방문이었다. 초음파 의자에 누워 설레는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무언가가 이상했다. 아기는 자라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7주 2일 차의 모습 그대로 멈춰있었다. 심정지 계류 유산이었다.


진료실에 있는 내내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음파를 보고 다시 진료실로 나와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현실을 직시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니 아이를 가진 태가 나는 임산부들이 보였다. 그들 역시 무엇을 겪고 그 자리에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H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자. 얼른 집에 가자. 집에 가서 편하게, 편하게 울자. 집으로 가는 길, 차 창으로 쏟아지는 빗물이 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비가 오는 걸까. 우리의 첫 아이가 간 걸 어떻게 알고.


집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현관으로 뛰어나왔다. 모카야, 너는 알고 있었겠구나. 누나 뱃속에 어느 날부터 콩콩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또 얼마가 지나 다시 소리가 멎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겠구나. 우리 모카도 많이 놀랐겠다. 소리 내어 고양이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다. 몸속에 있는 물이 다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H가 그렇게 서글프게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반나절을 내리 울고 미친 여자의 몰골을 한 채 친정에 갔다. 유산 경험이 없는 엄마는 매우 놀라며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유산의 이유. 엄마. 이유는 모른대. 염색체 이상일 확률이 높대. 그냥 원래부터 약한 아이였던 거래. 30대 산모의 셋 중 한 명이 겪는 일 이래. 그냥 수술하고 나서 생리 한 두 번 하고 다시 임신하면 된대. 엄마 아빠 잘못은 아니래. 근데 자꾸 내 잘못인 것만 같아. 내가 너무 멀리 일을 다녀서. 내가 너무 사소한 것에 자주 놀라서. 평소에 운동을 안 해서. 너무 생명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런 것만 같아. 내 말을 들은 엄마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유난스럽게 굴지도 않았다. 엄마를 보면 엉엉 울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상시의 일상인 듯했다. 그냥 배가 고팠다. 엄마가 차려준 저녁밥을 한 그릇 싹싹 긁어먹었다. 나 자신이 인간 같지 않게 느껴졌지만 수저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배가 고픈 자신이 너무 서글프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도대체 생명이란 뭘까. 태어나고 죽는 일이란 도대체 뭘까.




심정지 후 뱃속에 잔류하고 있는 아이는 자연 배출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약물이나 소파 수술로 강제 배출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수술을 한다면 자궁 내막을 기계로 긁어내게 된다. 소파 수술은 수면 마취 진행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당일에 퇴원이 가능한 수술이었다. '간단한 수술'이라는 말을 들었고 말 그대로 간단한 수술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에 상당한 회의감이 느껴지는 수술이기도 했다. 수술실과 분만실이 층에 있었기에 남편들은 수술실 복도는커녕 회복실로도 들어올 없었다. 결국 H는 내가 수술을 받는 동안 외부 대기실에 앉아 태어나 이동하는 신생아들과 전자 안내판에 안내되내 이름번갈아 봐야 했다. 수술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 되어서야 H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에 흠칫 놀랐다. 얼마나 별별 생각이 들었을까. 마음이 힘들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H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괜찮았어.

나는 미래를 보는 사람이잖아.


H의 따듯한 손


소파수술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부부가 모두 코로나에 걸렸다. 유산도 출산과 같아서 어느 정도는 몸조리를 해주어야 한다는열이 펄펄 나고 갈증이 가시질 않아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에어컨을 가동했다. '망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고통을 마주한 나는 본능의 노예였다. 생각보다는 경증이었으나 후유증은 남았다. 손가락 뼈마디와 손목이 쑤시고 시려 압박 장갑을 끼고 지내는 날들이 일상이 되었다. 무릎 보호대와 손목 보호대와 팔꿈치 보호대까지 보호대 4세트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아이를 다시 맞이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날의 나라면 절대로 납득할 없는 일이다.




아이가 사랑스럽다고 느껴본 적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서른 살 이전에는 전혀 없던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른 살 이후로는 지나가는 아이들에 종종 눈길이 갔다. 아이를 향한 학대와 폭력을 고발하는 기사를 보며 분노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라 여기긴 어려웠다. H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녀에 대한 우리의 의견은 늘 같았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게 전부였다.


유산을 겪은 직후 가장 극명하게 느껴진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나와 연결된 생명이 사라져 홀로 남겨진 공허함. 겨우 1cm가 조금 넘는 아기였음에도 심장 소리를 듣고 꼬물거리는 모습을 좀 보았다고 그것이 그렇게 서글프고 허무할 수가 없었다. 유산을 겪은 산모들이 몸을 추스른 이후 빠르게 재임신을 준비하는 데에도 그런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비어버린 공간을 빠르게 채우고 싶은 마음은 내 안에도 나타났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아이를 바랐나.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모가 되길 기다렸던가. 서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살아가며 꽤 많은 신비를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싹이 나는 씨앗. 신을 향한 애정. 미움을 용서하는 일. 극한에서 솟아나는 용기.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 하지만 생명을 품는 일은 예외였다. 객관적으로 굉장히 신비한 일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없으니 감정의 요동도 없었으며 타인의 경험도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건 순전히 겪어야만 알게 되는 일이라는 걸. 마른땅에서 생명이 창조되듯 마른 가슴에서 애정이 자라 오른다는 걸. 그렇게 부모가 된다는 것을 아이를 품고서야 알았다.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를 고민한 적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생각한다. 그건 마음의 일이니 만큼 마음에게 맡겨두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시험을 준비하듯 지식을 쌓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용량의 엽산을 먹고 있다. 의사의 의견에 따라 부족한 영양제의 복용량을 늘렸다. 매일 8천보 이상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양제 복용 여부와 운동 여부를 체크하는 어플을 깔고 매일매일 화면 속에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뼈마디는 여전히 아프지만 전반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유산을 겪은 직후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렸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하지만 유산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겪었으며 또 겪고 있는 일이었다. 먼저 유산을 겪은 지인들의 연락이 큰 위로가 되었다. 유산을 겪은 후 에너지 넘치게 몸을 회복하고 있는 이들의 경험담도 큰 힘이 되었다. 나와 H의 자녀 계획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에서 '있으면 행복하게 없어도 감사하게'로 바뀌었다. 포기하기 않고 준비하되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살기로 했다. 쉽게 된 임신으로 갖고 있던 오만한 마음을 반성하는 것까지 포함된 결심이었다.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나누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고 고요히 기다려줄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좋겠다. 그만큼 세상에는 아픔을 극복하는 부모가 많아질 것이고 포기하지 않는 엄마들이 많아질 것이다. 가정에도 사회에도 격려가 되는 일이다. 어느 타인의 이야기가 나에게 닿아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나의 이야기 역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모든 과정은 나에게도 위안이다. 아픈 이를 가장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마음으로 아파본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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