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집에 살 적에도 엄마의 방에는 식물이 무성했다. 가슴 언저리부터 밑단이 시작되던 창문 아래에는, 높낮이가 다른 수납장을 받침 삼은 식물들이 줄을 지었다. 물에 담근 초록과 흙에 심은 초록. 키가 큰 초록과 잎이 아래로 떨어지는 초록. 엄마는 종종 안방 바닥에 신문을 넓게 펼쳐두고 뿌리가 자란 식물의 화분을 옮겨주었다. 조그마한 노란색의 영양제를 꽂아주고 지지대를 세워주고 자리도 이리저리 바꿔주었다.
'네 방에도 뭐 하나 놔줄게'
엄마가 말하면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애초에 나의 대답은 상관이 없던 건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소박한 식물이 방 한 구석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손가락 두어 마디가 될까 말까 한 식물들. 그 아이들은 대개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아 자리에서 사라졌다. 내 방은 엄마의 방보다 덜 깔끔했고 나는 엄마보다 식물을 덜 사랑했기에. 엄마는 '어휴 이러다가 애 죽겠다' 하며 불온한 인간에게서 자식 떼어내듯 식물을 품고 방을 나갔다. 답이 정해진 물음과 함께 가까워지고 멀어지던 반복을, 나는 늘 무심한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것이 딱히 달갑지 않았는데도 멀어지는 모습은 사뭇 아쉬웠다.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은 예상치 못한 식물의 향연에 놀랐다. '여긴 어쩜 이렇게 쾌적한가요'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숨은 말은 '반지하 집이 이렇게 쾌적하기 힘든데' 였을 테지만 그들은 악의가 없었다. 엄마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웃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가면 나에게 설명했다. 이렇게 공을 들이지 않으면 이 집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그 꼴을 보지 않기 위해 엄마가 해야만 하는 노력에 대하여. 절반의 자부심과 절반의 의무감이 뒤섞인 설명. 반지하 집은 습하고 해가 잘 들지 않아서 식물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키우려면 많이 경험하여 어떤 것이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지를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반지하 집에서 식물 잘 키우는 법' 같은 책은 절대로 시중에 나오지 않을 테니 온전한 독자 개발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엄마의 식물원은 3층의 해가 잘 드는 베란다 정원이 되었다. 고난의 습지에서 식물을 키워내었던 경력으로 부추와 고추 같은 먹거리를 키우고 거대한 여인초의 어린잎까지 무럭무럭 틔워내고 있다. 친정에 놀러 갈 때마다 '이리 와서 얘 싹 난 것 좀 봐라'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어느새 나의 일상이 되었다. 엄마의 베란다에서 쪼그려 앉아 활짝 피어난 잎들을 보면 지난날 반지하에서도 꿋꿋하게 싹을 틔우던 초록의 향연이 떠오른다. 그 집을 떠나기 전 엄마는 말했다. '새 집에 가더라도 얘들은 다 데려가야 해. 가족이잖아. 어떻게 누구는 데리고 가고 누구는 버리고 가니.' 결국 그 아이들은 고스란히 엄마를 따라와 친정집 안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얼마나 마음이 갔는지,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내가 식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17년 언저리였다. 엄마가 키우던 선인장이 꽃을 피웠다. 눈을 마주치자 '어라'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왕관을 두른 모양새가 신비로웠다. 어떻게 이 뾰족한 것에서 이런 꽃이 날까. 늘 보고 스치던 것인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씨앗을 심고 물과 사랑을 주면 싹이 튼다.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고 꽃이 핀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시들해지기도 하지만 죽은 것 같았다가 이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제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도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 그것이 놀랍다 여겨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식물을 사랑하게 된다.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순간의 희열이랄까.
우리 집에서 가장 수난을 겪는 식물은 입문용 공기정화식물로 널리 알려진 아레카야자다. 기본적인 조건만 충족되면 쑥쑥 자라 주는 고마운 친구이며 무엇보다 고양이와의 동거가 가능한 식물이다. 식물중에는 고양이에게 유해한 종이 많아서 냥집사이자 식집사라면 식물의 유해성을 미리 파악하는 일이 필수다. 하지만 무해한 식물과 고양이의 동거에서 피해를 입는 쪽은 언제나 식물일 수밖에.고양이로부터 몇 번 시원스러운 가지치기를 당한 후 아레카야자를 포함한 몇몇 식물은 아크릴판의 보호를 받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집념의 고양이에게 포기 따위는 없나 보다. 우리의 파괴왕은 피아노를 밟고 올라가 모서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길쭉한 야자 잎을 당겨와 와삭와삭 물어댔다. 힘겹게 성취한 사냥감이라 그런지 이전보다 더 텐션이 높아 보였다. 아아… 내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결국 이사벨라 페페와 디시디아는 허공으로 도망쳤고작은 식물들을 1미터가 한참 넘는 선반 위로 대피했다. 하지만 무게가 상당한 야자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신혼집에 처음 들여온 식물인 아레카야자의 처참한 몰골을 마주한 날, 나는 그것이 곧 죽을 것이란 생각에 침통해 있었다. 길조나 흉조 따위를 딱히 믿지는 않지만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민망하게도 침통한 건 나뿐이었다. 특식을 챙겨 먹은 고양이는 느긋하게 낮잠을 잤으며 야자는 가만히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시무룩한 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엄마의 반지하 실내 농원이 떠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죽은 듯싶다가 되살아나는 식물들을 보았다. 바짝 말라버린 잎과 가지를 두고 화분을 비워야 하나 고민하다가 새로 돋아난 싹을 발견하고 안도하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생명이란 생각보다 끈질기다. 나는 곧장 인터넷 정보 탐색에 들어갔다. 큰 가지를 내버려 두고 다친 잔가지들을 잘라주라는 어느 식집사의 말에 어수룩한 가지치기에 들어갔다. 식물용 링거도 꽂아주었다. 각을 못 맞추어서인지 영 줄어들질 않다가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보니 삼일 만에 쏙 스며들었다. 못생겨진 식물의 모양새가 못내 아쉬웠지만 괜찮아 괜찮아, 쓰다듬으며 잎을 적셔주었다. 휑뎅그렁하게 잘려나간 줄기에 새로운 싹이 돋아난 건 그로부터 이주 뒤였다. 생각보다 빠른 회복력에 나는 깜짝 놀랐다.
부모의 품을 떠나 내 살림을 꾸리게 되면 생각의 카테고리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곳으로 간다.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때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어릴 적 엄마에게 종종 말했다. '동물은 너무 좋은데 식물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보고 배운 것이 무섭다고 정작 내 살림을 하게 되니 초록 한 점 없는 집이라는 게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어쩐지 온기가 없는 느낌. 생기가 없는 느낌. 이래서 인테리어의 완성은 식물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결국 나는 엄마의 습관을 답습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비하면 이런저런 장치들로 보호를 받고 있지만 아레카야자는 지금도 가끔 파괴왕으로부터 수난을 겪는다. 가지런히 퍼진 모양새도 아니며 마구 처참한 몰골도 아니다. 야자는 고양이가 잎을 씹든 그렇지 않든 새잎을 정기적으로 피워낸다. 남이 해코지를 하든 말든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모습 자체가 기특하여 위로가 된다. 식물들이 이유 없이 시들해지거나 노랗게 변하여 잎을 바닥에 톡톡 떨어트리면 속상하지만 이전처럼 '이제 곧 죽겠지' 지레짐작하지는 않는다. 이 아이들도 우리의 가족이니까 조금 아프더라도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면 마음을 알아주겠지 싶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초록에 조금 생기가 돈다. 기특하고도 무섭다. 나쁜 마음은 먹지 말아야지 싶다. 날 것의 마음까지 알아버리는 아이들인 것만 같아서.
화분 곁에 서서 가지를 잘라주고 스프레이를 칙칙 뿌리다 보면 엄마가 반지하를 벗어나던 날이 종종 떠오른다. '새 집에 가더라도 얘들은 다 데려가야 해. 어떻게 애들을 골라가니. 얼마나 서운하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엄마의 말. 적지 않은 화분 덕에 흡사 대가족의 이주와 다를 바 없었던 이삿날의 풍경. 불안하던 플라스틱 바구니를 밟고 넘어져 그릇을 다 깨버린 이삿짐센터 아저씨와 '아휴, 안 다치셨으면 되었어요.' 하며 그릇 값의 보상을 거절하던 엄마. 이삿짐 트럭에 실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고 작은 초록 잎들. 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 스며들어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언젠가 내 아이에게 '이리 와서 얘 싹 난 것 좀 볼래' 손짓을 하는 상상을 해도 딱히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이미 내가 엄마의 마음을 깊이 닮아버렸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