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by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 #인생 동화 #가치관
어릴 적 인생 동화는 무엇인가요? 저의 초등, 아니 국민학교 시절에는 단행본보다 세계 명작 동화나 위인전 전집 시리즈가 유행했습니다. 엄마들이 집집마다 형편이 닿는 대로 구매해 아이들에게 건네곤 했는데 저 역시 고전 명작 40권, 위인전 40권을 선물 받았지요. 몇 살 때였는지는 어렴풋하지만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벅찬 설렘을 느꼈던 것만은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요즘 어린이들이 최신 게임을 잔뜩 쌓아두고 무엇부터 할까 고민하는 즐거움과 견줄만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목들을 주르륵 살펴보며 그 안에 담겨 있을 세상이 궁금해 가슴이 두근거렸고 방학 내내 그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방학의 오후에는 부엌에 계시던 엄마가 저를 부르셨는데, 좀 전까지 엎드려 읽던 책 때문에 엉엉 울며 나갔던 기억도 나네요.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기 전 아내와 아이를 칼로 베는 장면을 읽고 있었거든요. 그의 비장하면서도 처절한 마음이 어린 제 마음을 너무 슬프게 했던 것 같아요. 깜짝 놀라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우느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던 저의 모습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미소 가득 품은 채 안아 주고 싶기도 하고요.
영상 매체의 영향이 적었던 그 시절에는 책장 속에 숨어 있던 세상이 더없이 흥미진진한 판타지였어요. 그때 저는 다른 소녀들처럼 <작은 아씨들>, <알프스 소녀 하이디> , <빨강머리 앤>은 물론이거니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 <보물섬> 등의 두근거림도 즐겼지요. 그중 <소공녀>, <비밀의 화원> 등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소공자>가 바로 저의 인생 동화입니다. 물론 소공녀 세라도 무척 좋아하지만 그보다 제게는 소공자 세드릭이 삶의 가치관을 열어주었어요. 어른이 돼서는 일본식 표기 대신 새로운 제목으로 출간된 완역본을 읽었는데 <Little Lord Fauntleroy> 라는 원제와 책의 내용을 잘 담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1886년 간행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책은 뉴욕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던 가난한 세드릭이 영국으로 건너가 도린코트 백작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둘째 아들 비비안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데 책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던지 레이스 칼라의 벨벳옷이라는 세드릭룩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8살이지만 예의 바르고 어른보다 깊은 심성을 지닌 세드릭은 또래가 아닌 다양한 어른들을 친한 친구로 두고 있는데, 가난했을 때도 막대한 부를 갖게 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작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늙은 백작은 성마르고 냉혹하고 속물적인 인간이었지만, 이렇게 신뢰를 받으면서 생전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았다. 자기 앞에서 움츠러들지도 않고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지 전혀 모르는 사람, 한 점 의심도 없이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리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까만 벨벳 옷을 입은 어린 사내아이라 해도 말이다. (p.97)
세상 경험이 많아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도린코트 백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믿어주는 손자 덕분에 주위 사람들도 놀랄 만큼 따스한 마음을 조금씩 보여주게 됩니다. 셀 수 없는 재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향한 작은 베풂조차 나누지 못했던 그의 변화는 어린 제 가슴에 너무나도 큰 가르침을 주었어요. 그때부터 마음먹었지요. 관계에 있어 진심 어린 태도와 믿음을 노력하며 살아가기로요. 진심을 다해 대하면 날 세우며 다가오는 마음도 조금은 동그래지는 것 같아요. 살아온 시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아직 믿습니다. 사람을 향한 순수한 믿음은 기적을 불러올 수 있다고요.
(덤) 지난 소개 책으로는 학생들의 베스트 동화를 전했기에, 오늘은 제 인생 동화를 이야기했네요.
브런치 100번째 글로 건네게 되니 더욱 의미 깊은 늦여름의 오후입니다.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읽다>, 김영하
✐ 나의 '인생책'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