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에는 좋아하는 책을 보물처럼 애지중지했습니다. 고운 색 한지 위에 투명 비닐 커버까지 공들여 씌울 정도였으니까요. 남기고 싶은 구절이 있을 때도 애장펜을 골라 자로 반듯하게 밑줄을 긋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중대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네요.
어른이 된 후에는 밑줄 긋기 외에도 책모서리 접기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책을 다 읽고 나서 습관처럼 책모서리를 보는데 어찌나 많이 접혀있던지 조그마한 아코디언이 떠올랐습니다. 북아코디언. 그때부터 저는 두툼한 북아코디언을 보면 저도 모르게 모서리 접기 한 곳을 엄지 손가락을 도르륵 훑곤 해요. 그러면 북아코디언이 제게 수많은 이야기를 연주해 주는 듯합니다.
마음에 깊이 담았던 따뜻한 연주를 아이들에게도, 동화를 사랑하는 어른들에게도 전하고 싶네요. 이야기 아코디언의 연주가 아이들의 살아감에 잔잔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동화 속에는 삶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된다면 동화책 한 권이 자신만의 안온한 안식처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빼곡한 학원 스케줄 속에서 읽어야 하는 책 마저 공부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아이들은 점점 책과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껏 읽고 또 다른 책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읽으며 상상의 세계에 빠져 뒹굴 수 있다면, 그러다 가끔은 엉뚱한 질문을 마구 쏟아놓을 수 있다면,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아이들은 책을 읽는 특별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거예요. 독서 후 정독했는지 확인받고, 독서 기록을 강요받고, 학습에 도움이 되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면, 책을 좋아하는 저조차도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떠나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는 저는 딜레마 속에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책의 힘을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되네요.
읽은 후 중고서점에 팔아야 한다면서 모서리 접기 한 장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눈치 보지 않고 좋아하는 장면에는 그림도 그리고,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며 줄도 팍팍 칠 수 있기를, 자신만의 북아코디언을 신나게 연주할 수 있게 되기를 온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남기고 싶은 페이지의 모서리가 가득 접히면 눈물이 날 만큼 근사한 북아코디언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