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by 성완 : #재개발 #시간여행
빨간 망토를 두른 호빵레인저 동생의 다부진 표정, 그런 수상한 동생의 모습을 몰래 따라가는 누나의 모습. 표지만 보아서는 여느 동화책 속에 나오는 우당탕탕 현실 남매의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호빵레인저가 들어가려고 하는 낡은 폐가는 그저 신나는 모험의 그럴듯한 배경 정도로만 여겨지지요.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책을 들고 간 아이들은 상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충격과 슬픔의 반응을 보였어요.
사실 저에게도 <마당을 나온 암탉> 속 잎싹의 죽음만큼이나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습니다. 잎싹의 이야기를 어느 나라에서는 소설로 분류한다고 들었어요. 먹이사슬 속에서 대립 관계였던 족제비의 새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잎싹의 마지막 선택이 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괜찮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라고 하네요. <내 동생이 수상하다> 역시 누나 민영이의 입장에서 재미있게 추리해 가던 아이들은 아기 고양이들을 구하다가 무너진 지붕 밑에서 발견되는 호빵레인저 민국이가 나오는 장면에서 정말 놀랐다고 해요. 저도 이렇게 허무하게 8살 민국이가 떠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뒷장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다가 이내 슬퍼졌습니다.
그렇게 민국이가 떠났다. 아빠 곁으로 가 버렸다
예고 따위는 없었다. 흔하디 흔한 작별 인사도 못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데려갔나 보다. 혼자 지내기가 너무 심심해서 우리 민국이를 데려갔나 보다. 차라리 맨날 말썽만 피우는 나를 데려가지. 할머니와 엄마가 너무도 사랑하고 의지하는 민국이 말고, 골칫덩이 나를 데려가지. 아빠도 할머니와 엄마처럼, 나보다 민국이를 더 좋아하나 보다.
그래서 아빠가 밉다. 민국이를 갑작스럽게 데려가서 밉고, 나보다 민국이를 더 좋아해서 밉다.(p.136)
이제 겨우 12살. 재개발로 철거될 정든 응달말을 떠나야 하는 민영이에게 이토록 가혹한 일들이 연이어 찾아오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나 깊은 한이 되었으면 여든 살의 민영이가 힘든 시간여행으로 열두 살의 민영이 앞에 나타났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명은 민국이를 되살리지 못하게 해요. 영화 속에 조차 타임슬립으로 운명을 바꾸는 에피소드가 나오기도 하는데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동화 같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체로 동화는 행복한 결말과 함께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그래서 이토록 짙은 현실감의 책을 만나면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책은 햇살 같은 희망을 품고 있어요. 민영이와 민국이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슬픔을 딛고 성장해 나갈 거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아이들도 이 책을 좋아합니다. 어떤 아이는 책을 통해 개발은 무조건 다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민영이 가족을 보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이야기했어요. 호빵레인저와 민영이는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이웃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해 준 게 아닌가 싶네요.
개발이 진행되면서 나는 알았다. 시련과 절망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예전엔 그게 그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은 힘든 일이 닥쳤다고 모두 절망하는 게 아니라,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절망했다. 희망이 끊긴 게 절망이라는 걸, 나는 마을 어른들을 보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은 사람들의 말수를 줄여 버린다는 것도 덤으로 배웠다. (p.59)
초등학교 방과후학교에서 14년 동안 논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동안 다양한 학교에서 수업을 했는데, 동네에 따라 아이들의 분위기가 달랐어요. 아파트 단지 근처의 학교 아이들의 고민은 공부, 학원, 친구가 주를 이루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지역의 아이들은 고민의 무게감이 깊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방학 때 더 좋은 해외로 여행 가기를 원했지만, 또 다른 친구는 매일밤 술을 마시는 엄마가 한 번이라도 등굣길에 깨어나 밥을 차려주는 게 소망이었지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도 각기 다른 환경의 아이들이 민영이를 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키우고, 나누고 배려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민영이와 비슷한 시련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작가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 같네요. 민영이와 민국이의 먹먹한 이야기를 통해 조금 더 좋은 세상으로 아이들을 이끌어 냈으니까요. 지금 어딘가에서 겨울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남매가 건네는 작은 꽃을 살포시 앞에 놓아주고 싶습니다.
"나는 항상 등대를 찾는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표류하는 것만 같은 인생에서,
내가 찾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크고 작은 등대들이다."
- <그림자 여행>, 정여울
✐ 시간여행을 해서 되돌리고 싶은 과거가 있나요?
힘든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자신만의 작은 순간들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