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체념>
강상중 교수의 책을 읽다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말을 인용하길래 노트에 옮겨 적었다. "인생은 한 갑의 성냥과 같다. 귀중히 다루기에는 시시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다루면 위험해진다." 난 공책에 성냥에 불이 붙은 모습을 그려놓았다. 성냥 하나는 실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터다. 울진의 그 울창한 산맥을 덜 꺼진 담배꽁초가 다 태워버린 것처럼 사소한 뭔가가 일을 다 망쳐놓는 건 사실 성냥갑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제는 형이랑 오랜만에 통화를 했는데 작년에 내가 별생각 없이 저지른 일 하나로 대차게 욕을 먹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를 완전히 적대시했는데 더는 가족으로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이 이렇게 되어 속상하지만 사실 귀중히 다루기에는 시시해서 내버려 둔 내 탓이 크다. 그게 산불처럼 일어나도 별수 없는 것이기에 난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없이 끊어버린 전화를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타버린 성냥갑은 복구할 수 없을 터고, 함부로 다룬 것을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어 애석한 마음이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더는 책을 읽지 못하고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문장에 '인생' 대신 '죽음'을 넣어보았다. 물론 류노스케가 자살로 죽어서 그런 건 아니다. 왠지 인생보다는 죽음이 훨씬 더 어울렸다. 죽음이 한 갑의 성냥과 같다면, 죽음을 귀중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근데 죽음은 성냥갑보다 더 함부로 다뤄진다. 죽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무서워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어떨 때는 죽음을 가정조차 하지 않고 사는 기분이 든다. 사람 다 죽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뭔가 시시해진다. 다 죽으니 아등바등할 거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짜증이 난다. 과장하는 말은 딱 질색이다. 자명한 말을 아무 데나 함부로 갖다 붙이면 다른 생각은 잦아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죽음 또한 귀중하게도 그렇다고 함부로 다룰 수 없어 곤란한 것이다. 만약 형과 내가 생과 사를 오가는 거대한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면 이런 사소한 하나하나로 날을 세우고 있었을까. 그땐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굴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생긴 불운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연민하고 세상 다정하게 굴지도 모른다. 우리는 끄트머리에 가서야 절실해지는 건가. 그걸 알면서 왜 모든 걸 시시하고 함부로 대하고 있을까. 사실 더없이 귀중한 걸 알면서도 그러고 있다. 인생이든 죽음이든 관계든 성냥갑은커녕 컵에 가득 든 커피도 어쩌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족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 치고 싶어 진다. 5월 가정의 달은 그래서 내게 고통스럽다.
최근에 폴 칼라니티의 책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읽었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부분에 밑줄을 쳤다. 폴은 늘 환자의 죽음과 마주하며 살던 외과 레지던트였는데 암에 걸려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진짜 죽음과 직면한다. 아내도 의사여서 그런지 두 사람은 체념의 단계를 빠르게 익힌다. 죽음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어질 정도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은 폴이 암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별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갈등과 권태도 폴의 암 덩이 앞에서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죽음이 지근거리까지 오자 작디작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마치 서로의 사랑을 인제야 깨달았다는 듯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애틋하게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폴과 그의 아내도 서로의 사랑은 성냥갑을 다루듯 해왔을까. 진중한 물음이 가득한 에세이집에서 나는 타오르는 성냥갑을 보았다.
형과 전화를 끊고 어머니와 통화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완연히 노년을 즐기고 계신다. 형이 새 차를 뽑아주기로 했단다. 스포티지 신형이 그렇게 예쁘다나. 잔뜩 상기된 목소리에서 여전히 지루함에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게 고작 십 년밖에 안 될 텐데, 그전에 번듯한 차 한 번 몰아보는 게 그렇게 큰 바람은 아니지 않냐." "나도 처음에는 그냥 경차 탈까 했는데, 그래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는 차니까 욕심 좀 내보려고." 너무 지당한 말씀이라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내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교외의 한적한 도로를 중형 SUV로 가로지르는 광경을 상상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삶을 체념하기에는 아직 젊은 기운이었다. 삶을 다 산 것처럼 허탈해하는 아버지와 달리 그녀는 여전해서 좋았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푼돈이라고 벌고자 동네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한 전기밥솥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했다. 고작 다 완성된 밥솥 뚜껑에 압력 밸브를 부착하는 일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물건이 내려오면 얹었고 꽂아놓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간도 길지 않았다. 두 아들 학교 보내고 점심 먹고 저녁이 오기 전까지 걸어가서 일하고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약속했던 돈도 다 받지도 못했다. 왜 그만뒀냐고 물으니, 도무지 지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늘 공장에 초소형 라디오가 들고 갔는데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뚜껑을 얹는 작업을 하며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꼈다. 난 당시에 어머니의 끈기 없음에 한심함을 느꼈지만, 최근에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운전대 앞 스크린은 계속 변화했고 어쩔 땐 창밖으로 정경이 펼쳐지기도 했지만 늘 가던 길은 뻔한 드라마처럼 내겐 고역이었다. 핸들을 자유자재로 돌릴 수 있었지만, 목적지가 같은 여정은 폐곡선처럼 시무룩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반복하는 건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이 분명하다. 아무리 라디오를 돌려서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들어도 한 시간만 지나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다.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고, 일이 아니었으면 듣지 않았을 게 자명한 주파수니까. 그러니까 밥솥 뚜껑을 얹는 일이 아무리 쉽고 단순해도 그 단순함 때문에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최유라 목소리를 좋아했는데, 그 쾌활한 성대도 집에 가서 전화통을 붙잡고 이웃집 아줌마들을 모아서 수다를 떠는 어머니의 재기를 막을 순 없었다.
삶이 재미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머니가 공장을 뛰쳐나간 것처럼 불가능한 일에 관한 기대를 쉬이 접고, 가능한 한 재미를 단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형은 형대로 돈 버느라 바쁜데 미간의 주름 좀 폈으면 싶고, 생각보다 목소리가 좋았던 아버지의 노동에도 달큼한 의미가 깃들기를 바랄 뿐이다. 포항의 채광 좋은 카페에 앉아 우리 가족의 서로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 모두 부디 재밌게 지내시기를.
표지 사진은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가 큰 성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