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r 29. 2021

콧수염과 허벅지

운동 <스쿼트>

ᅠ나의 수요일은 언제나 하체 하는 날이다. 수요일에 꼭 하체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월요일은 가뿐한 가슴 운동을 하고, 화요일엔 넓은 어깨를 위해 등을 잡아줬으니 남은 부위가 하체일 뿐이다. 이틀간 상체 운동을 제대로 했다면 가슴과 등이 앞뒤로 뻐근해서 이제 하체만 남은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느슨해지기 쉬운 일주일의 복판에 가장 고된 운동을 배치해서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도 있다. 그렇지만 하체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언제나 힘에 부치고 가혹한 기분에 시달린다. 내 주위에는 헬스에 하체만 없다면 매일 할 수 있다는 애도 있다. 근데 운동을 해보면 하체 하는 날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살짝 현기증이 나며 좀 더 심할 경우 점심에 먹은 돈가스 향이 확 올라오면서 속이 메슥거리는 그 기분. 내가 몸을 제대로 단련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헬스의 참맛이다. 내 경우네는 하체를 얼마나 제대로 하는가에 따라서 한주 운동의 질이 판가름 난다. 인체 근육 7할이 하체에 있다고 하니 두말할 거 없다.


 결론적으로 하체 하는 날은 주간 헬스의 정점이다. 그럼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뭘 하면 될까. 바쁜 직장인이라면 주 3일도 버거울 테니 빼먹거나 더 단련하고 싶은 부위를 공략하면 된다. 충실하게 수요일까지 상하체를 모두 털어냈다면 유산소를 하거나 어깨나 복부 팔처럼 작은 근육을 단련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일이 너무 바쁘거나 몸이 안 좋으면 어쩔 수 없이 운동하는 요일을 월, 수, 금으로 짜서 하체를 마지막으로 주말을 맞이하는 루틴도 나쁘지 않다. 그런 경우네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가벼운 러닝이나 맨몸 운동을 해준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획은 계획이고 어떻게든 일주일에 세 번은 갈 거라고 굳게 다짐한다.  


 사실 하체에 어떤 근육이 붙어있는지 잘 모른다. 가끔 구글로 이미지를 검색해 봐도 순대처럼 구불구불하고 족발처럼 살과 지방이 어우러진 근육이 보이긴 하지만, 어떻게 움직이면 어디가 자극이 되는지 까지는 잘 모른다. 그저 운동 후에 허벅지와 엉덩이가 뜨거워지면 숨이 가빠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럴 때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장 짜릿한 순간은 하체 한 날 자고 일어난 목요일 아침 출근길에 찾아온다. 사무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내 엉덩이가 거기 붙어있었구나 실감할 수 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를 때마다 엉덩이 근육은 중력에 저항하고, 머릿속으로는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봉기하는 광경이 그려본다. 종일 사무실 의자에서 짓눌렸던 지방 덩어리가 찢어지고 그 자리에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에 들어있는 캡슐형 유산균보다 더 단단한 단백질 알갱이가 콕콕 박힌다. 이를 전문 용어로 초과 회복이라고 하던데, 찢어진 근육에 살이 추가로 덧대지면서 근육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근육통은 단순히 근력 운동의 징후를 넘어서서 노화에 대한 거스름이자, 몇 조각 뜯어먹고 방치된 파전과 같이 눅눅해진 내 자존감의 회복을 의미한다. 


ᅠ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체육관에 들렀다. 평소 드나들던 1년짜리 헬스장 이용권이 만료된 김에 큰맘 먹고 좀 비싸더라도 시설 좋은 곳에 가보고 싶었다. 헬스장 입구에 150개는 훌쩍 넘는 화환이 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보디빌더 선수 출신 사장님이 인싸신가 보다. 보디빌더는 혼자 운동해서 아는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그거야말로 편견이었다. 내가 아싸라고 운동하는 사람은 다 고독하리라 짐작하다니. 헬스장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장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팔이 광배근에 걸려서 어색했다. 갑자기 사장님 인싸력은 저 우람한 어깨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 어깨 하나로 인간관계가 아주 평온해지셨구나. 끄덕끄덕, 알만했다.


 등록비는 광고보다 비쌌지만, 오픈 기념 할인 중이라서 큰맘 먹고 등록했다. 절대 사장남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사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강매당한 건 아니다. 뭔가 압력이 있긴 했지만 나도 사장님처럼 쫙쫙 갈라지는 하체를 갖고 싶었다. 안 그래도 최근 하체 운동이 부침을 겪고 있었다. 난 운동을 해도 효과가 없고 점점 드는 무게를 낮아질 때 주로 장비 탓을 하며 쇼핑을 했다. 그러면 곧잘 좋아지곤 했다. 근데 최근에는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하체 근력이 좋아지질 않았다. 벨트도 신제품으로 사고, 보디빌더가 주로 쓴다는 무릎 보호대도 찼는데도 별 진척이 없어 다른 핑계가 필요했다. ‘아 헬스장을 바꿔야 하는구나.’ 수행능력이 더 늘지 않는 이유로 아직까지는 노화를 들고 싶지는 않아서 손쉽게 운동하는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늙은 게 아니라 조금 권태로울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장님이 피티도 한 번 공짜로 해준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내가 수년째 다닌 헬스장은 싸긴 정말 쌌다. 일부 기구는 녹이 슬고 스미스 머신이나 벤치도 한 개뿐이었지만 익숙함에 젖어 계속 이용했다. 진짜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혹해서 1년 치를 한 번에 등록했다. 근데 난 고수가 아니라서 그런지 점점 더 지겨워졌다. 구력이 족히 삽 십 년은 넘어 보이는 베테랑 어르신들과 섞여서 극찬과 코칭을 받으며 인생을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시설 좋은 곳에서 레깅스 운동복을 입은 회원들과 청량한 기운을 느끼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싶었다. 약물 사용이 의심되는 거대한 근육을 가진 청년 사이에서 운동하면 당연히 정신적으로 더 큰 자극이 올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업한 지 한 달도 안 된 헬스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형형색색 운동복을 입은 회원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기가 죽었지만 내가 원하는 분위기였다. 


ᅠ새 헬스장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조명과 거울이었다. 단백질 셰이커를 흔들며 어깨에 복압 벨트를 걸친 내 모습이 지큐 머슬&피트니스나 맨즈헬스 화보에 등장하는 모델처럼 근사해 보였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몸도 안 풀고 바로 쇳덩이를 어깨에 얹었다. 쇳덩이라고 부르기에는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엘리코 바벨이었다. 명품 바벨이라고 더 가벼울 리 없는데 어쩐지 더 힘이 나서 가뿐하게 한 세트를 마쳤다.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강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무리 요즘 하체가 약해졌다지만 그래도 고작 140킬로에 숨이 넘어갈 듯 헥헥대니 세월이 야속할 뿐이었다. 그렇다, 한 해 한 해 들어 올리는 무게가 줄고 있다. 이제 어디 가서 삼 대 오백 친다고 허풍은 못 치겠다. 사면에 붙어 있는 거울이 내 몸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조명이 조금 비껴가자 지큐 화보는커녕 나약한 사내의 당혹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알던 강인하고 날렵한 몸뚱이는 온데간데없고 굼뜨고 느려 터진 아저씨가 거울 속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난 성급히 내 눈을 피했다. 표정을 가다듬고 단백질 파우더의 달곰씁쓸한 맛을 음미했다.


ᅠ다음 세트를 준비하는데 어쩐지 멀찍이서 한 무리가 내 운동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봉에서 바벨을 하나 빼려다가 자존심상 무게를 더 올렸다.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헬스는 자기와의 싸움이라더니 난 고새 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운동으로 변환했다. 거의 올림픽 무대에 선 장미란 선수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괄약근과 배에 힘을 꽉 주고 다시 리프팅을 시작했다. 고통과 저항이 공존하는 공개 시험대에 나를 내던졌다. 다리가 풀리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며 겨우 5개를 채웠다. 근데 나를 지켜보는 줄 알았던 무리의 시선이 내 옆자리에 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나보다 바벨을 30킬로쯤 더 끼우고도 조용히 열 개씩 해대는 청년이었다. '네가 에이스구나.' 세상에는 강자가 너무 많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건 동네마다 고수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헬스장 구석구석 날고뛰는 청년들이 가슴 등 어깨를 과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음메 기죽어. 난 조용히 바벨을 두 개씩 빼고 고립 운동에 전념하기로 했다. 


ᅠ신장 개업한 헬스장의 가장 큰 장점은 최신식 웨이트 기구가 즐비하다는 점이다. 노 젓는 로잉머신도 독일제라 그런지 벤츠처럼 고급스러웠고, 고정식 자전거 에르고미터는 내 몸의 바이오리듬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보여줬다. 심지어 산소호흡기가 달린 러닝머신도 있었다. 심장 모니터 전극과 대형 텔레비전 스크린이 달린 장비였다. 퇴근하고 헬스장에 들른 열 명 안팎의 직장인들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라디오스타를 보는 모습을 상상이나 한 적 있던가. 조지 오웰이 여기 왔으면 이들이 바로 빅 브러더의 목소리에 놀아나는 노예들이라며 호통을 쳤으리라. 러닝머신이 너무 좋아 보여서 나도 생전 안 하던 트레드밀에 올라탔다. <고등래퍼> 재방송을 보면서 달리니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운동이 아니지. 쇳덩이 없이 설렁설렁하는 건 나랑 어울리지 않아.'


ᅠ다시 랙으로 돌아가서 누가 볼세라 10킬로 바벨을 빼고 세 번째 세트를 시작했다. 벌써 허벅지에 감각이 마비됐다. 옆자리에 아리따운 여성분이 있었지만, 힘에 부치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허세가 통하지 않는 나이다.' 힘이 빠지는 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저 멀리서 GX(Group Exercise)룸에서 몸을 푸는 한 무리를 지켜봤다. 제발 스판덱스만은 입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은 이들이 요란한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거울 위쪽을 보니 일일 피티 가격이 무려 한 시간에 십만 원이나 했다. 온갖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젊고 잘생긴 트레이너가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회원들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왠지 나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트레이너에 도전해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느니 운동에 올인했으면 더 몸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책상머리에서 씨름할 게 아니라 쇳덩이와 싸우는 게 내 운명이지 않았을까. 아닌가 일로 하면 운동도 지루해졌을까. 


ᅠ한때 멋모르고 체육인으로 사는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육체의 실감이 세상 모든 문학적인 수사보다 더 현현할 때, 만약 노동이 운동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했다. 랩 하면서 돈을 버는 래퍼들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골을 넣으면서 매주 수억씩 버는 손흥민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면 출근해서 운동하고, 일하면서 운동하고, 퇴근할 때도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럼 가책 없이 저녁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다음 날엔 해장으로 임연수어를 흡입했을 텐데. 그럼에도 내 몸은 점점 더 조각처럼 단단해져서 화려한 밤에 아주 유용히 쓰였을 텐데. 문학은 무슨 문학이고, 내 경험상 밤에는 육체만 현현했다. 치솟는 테스토스테론은 사무실 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하다가 쓸데없는 잡념이 끼어드는 걸 보니 이제 운동을 마칠 때가 온 모양이다. 


ᅠ네 번째 세트를 준비할 때 옆자리에서 열심히 둔근 운동을 하던 여성분이 휙 가버렸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어쩐지 야속함이 느껴졌다. 내심 날 응원해 주길 바랐던 관객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힘이 빠지는 속도가 더 가팔라졌다. 내게 가해지는 중력 가속도가 9.8㎨를 초과해서 나를 주저앉힐 기세였다.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그래 고마해라. 할 만큼 했다 아이가.' 짐을 챙기려던 차에 스판덱스 여신이 사라진 자리에 나랑 동년배로 보이는 콧수염이 물통과 벨트를 내려놓았다. 다 값비싼 장비들이었다. 장비빨이나 세우는 뜨내기구만. 뭐든 장비 탓으로 돌리고픈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저 양스러운 콧수염은 또 뭐래. 콧수염은 태닝 기계에 초벌구이 한 몸처럼 까무잡잡했다. 무슨 식용유를 처발랐는지 번들거렸다. 머리를 바짝 세웠고 콧수염은 관리가 부실해서 김흥국 같았다. 콧수염은 몸을 풀면서 지나치게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거울 속 제 모습에 만족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분명히 누군가를 의식한 표정이었다. 그의 팔뚝 안쪽에 달팽이 모양 문신이 있었다. 민트 그린 색 나이키 트레이닝 상의에 언더아머 쫄쫄이라니. 그는 딱 130을 끼우고 스쿼트를 시작했다. 분명히 내가 120이라서 하나 올린 거였다. 한 번 해보자는 거지? 내 바로 옆에서 스쿼트를 따라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선 넘네. 어느새 분위기는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에어팟으로 들리는 공격적인 '창모'의 래핑이 내 남성 호르몬에 마라향을 첨가했다. 어느새 콧수염과 나만 남겨진 오징어 게임이 되어 있었다. 


 미련하고 지난한 경쟁이 시작됐다. 그가 한 번 하면 내가 그보다 한 개 더하고, 그가 다음 세트에 무게를 늘리면, 나도 오 킬로를 더 끼워서 우위를 점했다. 그는 나와 동종이었다. 어디서든 경쟁을 모토로 삼고, 승부에서는 관우가 되어버리는 미련한 유형. 그는 세트가 끝날 때마다 거울 앞에서 어색한 포징을 해서 날 메슥거리게 했다. 턱을 살짝 들고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는 꼴불견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어디 대회라도 나가는지 국회의원 선거포스터 같은 표정을 짓고 수도 없이 포즈를 취하는 게 꼭 나를 도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싸움을 걸면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늘 인생을 건다.


ᅠ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난 내일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다행히 콧수염은 에어팟을 귀에 꽂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난 거울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숨을 몰아쉬었다. 콧수염은 남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목소리로 애인과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그가 하는 이야기란 놀라울 정도로 전형적이었다. 자신이 운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오늘 자기를 괴롭힌 상사가 얼마나 못됐는지. 롤렉스 시계를 어떻게 싸게 샀는지. 대학 시절 룸메이트를 우연히 만났는데 자신과 달리 폭삭 늙어버려서 놀랐다든지. 실내 인테리어 견적을 뽑았는데 얼마라든지. 그는 점점 더 크게 떠들기 시작했다. 헬스장 음악 소리를 압도하는 떠버리였다. 전형성에 허세가 잔뜩 든 말투가 곁들여졌다. 통화 마무리는 구색을 갖추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끝맺었다. 계속 자기 말만 하다가 사랑한다니, 그게 사랑이냐. 절로 타이레놀 두 알을 찾게 하는 허세였다. 난 아니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복귀에 맞춰서 보란 듯이 바벨을 더 늘렸다. 


 내 하체는 분노로 점점 더 부풀었다. 콧수염의 요란한 기합 소리와 신음 섞인 말을 견뎌내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 관세음보살에 가까운 초탈한 표정으로 운동을 끝마쳤다. 그래 내가 졌다. 콧수염의 통화를 엿들으면서 나는 생각보다 콧수염에 관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요즘 일과를 들었고, 지난 주말 애인과 갔던 오마카세의 상호명을 기억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콧수염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아이폰으로 몇 가지를 메모했다. 나야말로 콧수염에 관해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사는 동네도 같은 데다가 심지어 운동 능력까지 같은 레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과도한 자의식으로 점철된 신변잡기야말로 그와 나의 공통된 특기였다. 그는 말로 떠들고 난 글로 쓰니 내가 좀 더 나은 거 같긴 했다. 난 콧수염과 하체운동을 주제로 한 글 하나를 쓸 생각을 하며 짐을 챙겼다. 


ᅠ콧수염 덕분에 평소보다 운동을 삼십 분 더 했다. 나는 결국 허리 통증이 와서 쿡쿡 쑤셨지만 만족스러웠다. 다음에 콧수염을 보면 같이 짝을 이뤄서 하자고 할 생각이다. 샤워실로 향하는데 내 뒤로 보이는 거울 속 콧수염이 아직도 안 지쳤는지 열심히 포징을 하고 있었다. 콧수염은 제법 귀여운 데가 있었다. 그와 농담 한마디 나누지 않은 게 후회됐다. 난 속으로 그가 탈모 관리를 잘해서 휑한 윗머리가 콧수염처럼 빽빽해지기를 속으로 빌었다. 


ᅠ새로 개업한 곳이라 그런지 샤워실은 물비누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 이런 거대한 바우하우스풍 헬스장을 차릴 수 있는 재력이 부러웠다. 역시 돈은 없는 사람만 없지, 불황이다 뭐다 해도 있는 사람은 척척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낸다. 샤워실 거울을 보니 내 하체가 보기 좋게 부풀어 있었다. 복부는 마음이 아파서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진짜 사과 한쪽만 먹고 자야지. 예전처럼 짝을 이룰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무실 경찬이, 옆 사무실 원도와 운동이 끝나고 웃고 떠들었던 옛 시절이 그리웠다. 난 요즘 소란이 필요한 시기를 겪고 있다. 이건 대도시의 고독이라고 아무리 우겨대도 별로 나아질 게 없는 외로움을 안고 산다. 하체 근력의 중요성을 글로 적을 게 아니라 운동 끝나고 맥주 한 잔에 치킨 뻑뻑 살을 뜯으면서 떠들 연인이 그립다. 어디 운동 잘하는 여자 없나. 


ᅠ집에 돌아와서 몸을 뉘었다. 몸을 탈탈 털었는데 뜨거운 물까지 들이부으니 축 늘어졌다. 왓챠에서 <데브스>라는 드라마를 틀었다. 미래 사회를 그린 SF물인데 다들 몸이 날씬했다. 나는 베개에 기댄 채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편의점에서 사 온 비빔밥 그리고 후식으로 먹을 아몬드를 늘어놓고 흐리멍덩한 눈으로 미래 사회의 살풍경한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니까 미래에는 체중 조절도 기계가 해주고, 아몬드 25알을 챙겨 먹지 않아도 알약 하나만 먹으면 배가 하나도 안 고픈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이 오면 난 헬스장을 가지 않게 될까. 나는 동공만 열어두고 쩝쩝거리면서 졸음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은 차츰차츰 뒤안길로 물러났고 풀려가는 눈은 하루의 끝을 반겨왔다. 그러다 놀라서 퍼뜩 일어났다. 아 제기랄. 단백질 셰이크 먹는 걸 까먹었다. 삼십 분 내에 먹어야 하는데! 나는 용수철처럼 의자에서 몸을 튕겨내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서 초콜릿 맛 프로틴 두 스푼 넣어 마셨다. 아이허브에서 유기농이라고 칠만 원 넘게 주고 산 농축 단백질 가루였다. 돈을 좀 들이니 비린내도 없고 소화도 잘된다. 누가 이런 건 선수나 먹는 거라고 했지만, 자고로 운동은 먹는 게 다라서 나도 따라서 샀다. 마음은 선수 못지않으니까. 웃통을 벗고 거울을 보며 몸을 체크했다. 내가 젊을 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걱정한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늘 내 하체는 수요일을 버텨냈다. 내일은 몸을 좀 풀고자 달리기를 해볼 생각이다. 요즘 날도 좋으니 딱딱해진 몸을 느슨하게 만들어줄 좋은 기회다.  

이전 02화 등짝으로 만든 세계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