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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9. 2021

별생각 없이 힘껏 달리기로 해

운동 <러닝>

ᅠ퇴근하자마자 집 근처 천변으로 향했다. 오늘은 헬스장 대신 러닝하는 날이다. 개천가에는 곳곳에 철봉과 평행봉이 있어서 우선 턱걸이로 몸을 풀었다. 기분 좋은 흥분이 등 허리께에 느껴졌다. 광배를 쭉 늘이고 승모근이 쫀쫀해질 때까지 당겼더니 아스라한 통증이 올라왔다. 화요일에 한 등 운동이 잘 되었다는 증거였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등 전체를 자극했다. 고구마를 까 드시는 할머니 몇 분이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날 지켜보고 계셨다. 난 젖 먹던 힘까지 내보이며 철봉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드렸다. 몸을 다 풀고 잠시 허리를 편 채 서서 노을로 물든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은 해가 떨어지고 나서도 얼마만큼 사라지지 않다가 차차 검붉게 변해갔다. 어제 한 스쿼트 탓인지 다리가 쿡쿡 쑤셔왔다. 퇴근하고 나서 근육통을 핑계로 나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무구한 하늘을 보니 안 나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다행히 오전부터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퇴근할 무렵에 건듯 개었다.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선선한 게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개천가에는 부지런한 러너들이 벌써부터 나와서 열심히들 뛰고 있었다. 나도 걷는 듯 천천히 유럽의 운하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슬슬 뛰기 시작했다. 에어팟으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틀었다. 날렵한 제1 바이올린이 적막을 깨고 완만하게 선율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야흐로 막 장마가 끝난 무렵이라 일 년 중 어느 철보다 가장 뛰기 좋은 시기였다. 하루살이와 초파리가 많았지만, 새옹지마라고 마스크를 쓰니 신선한 공기만 코와 입으로 들락거렸다. 


ᅠ러닝크루 정기 모임 장소에 시간 맞춰서 도착했다. 백 명도 넘는 회원 수를 자랑하는 크루답게 벌써 수십 명의 회원이 나와 있었다. 난 일주일에 한두 번쯤 참석해서 팔 킬로 정도 뛴다. 크루원이 다 모이기가 무섭게 몸을 풀고 달릴 준비를 했다. 나는 맨 뒷줄에서 나이키 러닝 앱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보로 시작해서 조금씩 스퍼트를 올렸다. 얼굴만 아는 옆 사람에게 요즘 근황을 묻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꼴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개천에서 보는 사이지만 신변잡기에 가까운 말로 생활감을 공유하다 보니 무척 친근했다. 아마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런 느슨한 거리감이 러닝 크루를 선호하는 이유기도 하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 나로서는 무뚝뚝한 나와 기꺼이 뛰어주는 그들의 다정함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 킬로 부근에서 반환점을 돌고 스퍼트를 좀 올렸다.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팔딱였다. 개천 공원 잔디밭을 뒹구는 레트리버 옆으로 훤하게 뚫린 코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리더가 구호를 내리자 우리는 좀 더 내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자 신이 났다. 무거운 몸을 무릅쓰고 뛰러 나온 내가 무척 어여뻤다. 주말로 다가서는 목요일 저녁인데 술 약속도 마다하고 이렇게 뛰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사실 별 약속도 없었지만, 뛸 약속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운동을 한다는 건 이처럼 막연한 자긍심을 안겨주는 확실하고 드문 취향이다.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밤안개로 자욱한 공기와 부드러운 땅의 숨결이 내 코로 들락거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둔해 빠졌던 정신도 점점 더 명료해졌다. 난 몇 년 전만 해도 오직 헬스만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유산소 안 하냐고 물어보면 근손실 난다고 손사래 쳤다. 그냥 스쿼트를 가벼운 무게로 횟수를 늘리면 유산소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우겼다. 내심 속으로 러닝을 무시했던 것 같다. 왠지 삐쩍 마른 사람들만 하는 운동처럼 보였달까. 어르신이 가볍게 마실 갈 때 하는 운동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 년 전쯤 우연한 기회로 러닝크루에 참석하고 모든 게 달라졌다. 한 마디로 사로잡혔다. 뛴다는 기쁨을 잊고 살다니 믿을 수 없었다. 헬스장 러닝머신에서는 느낄 수 없는 벅찬 기분이었다. 난 나도 모르게 헬스장 아니면 운동도 못 하는 실내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러닝을 하자 오히려 근력 운동 수행 능력도 더 늘었다. 무엇보다 엉덩이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피가 도는 게 다 느껴질 정도로 육체의 원초적인 기쁨이 있었다. 이건 그 어느 운동에서도 가져올 수 없는 관능적인 매력이다. 


ᅠ코스 막바지에 다다르며 차가운 저녁 바람이ᅠ벌겋게 달궈진 이마와 볼을 식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을 활짝 벌렸다. 에어팟에서 나오는 ‘I Believe I Can Fly’를 흥얼거렸다. 이제 훨훨 날 수 있다고 울부짖는 R. 켈리의 가사가 위대한 러너를 향한 찬양가로 들렸다. 19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에 빙의해서 막판 스퍼트를 감행했다. 어려서부터 올림픽 마라톤 골인 장면을 하도 많이 봐서인지 한동안 뛰기만 하면 황영조 선수의 예쁜 배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마라톤 복은 배꼽티일까. 황영조 선수는 방송사의 애국가 영상에 단골손님이었다. 난 자정 넘어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애국가가 나오면 잘 준비를 했는데, 그가 포효하는 장면을ᅠ마지막으로 방송이 종료됐다. 


 좀 무리했더니 늑골 아래가 쿡쿡 쑤셔왔다. 42.195는커녕 10킬로도 채 달리지 않았는데 내 횡격막이 속도를 줄이라고 난리였다. 왜 난 '러너스 하이'가 찾아오지 않는 걸까. 아니지. 하긴, 이 정도 뛰고 무슨 러너스 하이가 오겠나. 기껏해야 러너스 미들 정도 되겠지. 올 가을에는ᅠ하프 마라톤 신청도 해놨겠다, 육상화도 큰맘 먹고 나이키 알파플라이로 바꿨겠다, 언더아머 타이츠랑 머리띠도 산 김에 더 열심히 훈련하겠다고 결심했다. 난 달리면서 훌륭한 러너가 되기 위한 쇼핑리스트를 완성했다. 벌써 장바구니를 가득 찼다. 맨 앞줄의 리더가 뒤를 돌아보더니 더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난 허리를 곧추세우고 쇼핑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 생각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ᅠ사람들이 모인 종착지에 다가서자 눈앞이 환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숨 가쁜 헐떡임이 주는 신비로운 열기랄까. 함께 뛰는 멤버들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넉 달간 함께 동거동락했던 훈련소 동기들 생각이 났다. 지금은 다 퍼진 아저씨가 된 그들의 젊음을 떠올렸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인스타그램에서 본 몇몇 친구는 얼굴이 평안해 보였지만, 복부 지방을 보니 훈련소의 날렵한 청년의 모습은 온 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 구호를 쩌렁쩌렁하게 외치던 그날을 기억할까. 그땐 밥만 잘 먹여주면 하루 종일도 뛰었는데, 지금은 저질 체력이 되어버렸다. 오늘 함께 뛰는 멤버들 나이도 나랑 얼추 비슷해 보였다. 내가 좀 더 동안이긴 하지만 다들 운동을 꾸준히 했는지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나와는 달리 다들 직장인 특유의 우울함과 무뚝뚝함은 온데간데없고 두 다리가 솥에 넣은 오골계처럼 날래보였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친구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ᅠ도착하고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나날이 심폐 지구력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몸 구석구석에 근육이 붙어서 몸도 무겁다. 처음 헬스장을 찾았을 때를 떠올려봤다. 그날 가슴팍이 뻐근해지면서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는데, 그건 러닝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었다. 한 마디로 러닝은 기분이 다고, 근력 운동은 결과로 증명한다. 러닝도 기록이 있지만 내 경우에는 기록보다는 뛴다는 행위가 주는 쾌감이 중요하다. 하지만 근육은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 헬스를 하면서 몸이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이니ᅠ뭘 하든 자신감이 붙었다. 거울에 비치는 내가 마음에 드니 이후로는 쇠질을 끊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러닝은 날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이끈다. 언젠가 친구에게 러닝을 하고 나면 살맛이 난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로 정확한 표현이다. 가끔 관절이 아프고 몸으로 느껴지는 변화는 미미하지만, 헐레벌떡 뛰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졌다. 


ᅠ러닝을 끝나고 카페에 가서 새벽까지 글을 썼다. 시험 기간인지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즐비했다. 어두침침한 교복이 대형 할리스커피 매장을 가득 메웠다. 어른들 잘 때 용케 빠져나와서 공부한답시고 앉아서는 떠들고 노는 학생들이 귀여웠다. 녹초가 된 채 카페로 와서 그런지 글쓰기에 도통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학생들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난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멘붕 상태인데, 학생들은 별별 얘기를 다 다뤘다. 반 애들 걱정, 담임 걱정, 대학 걱정, 유튜브 걱정, 연예인 걱정, 게임 레벨 걱정까지. 실로 다양한 근심이었다. 그렇게 세상 걱정 다 하면서 공부는 언제 하려는 걸까. 누가 누굴 걱정하냐. 내 코가 석잔데. 글은 쓸수록 잔근육이 붙는다는데 난 여전히 빼빼 마른 멸치에 불과하다. 근력이 없는지 늘 힘에 부친다. 헬스장에서는 어떻게든 근육을 자극할 수 있는데, 카페에서는 백지만 보면 주눅이 든다. 하도 글이 나오지를 않아서 내가 참여하는 러닝크루와 달리는 기분에 관해서 써봤다. 


 카페ᅠ영업ᅠ마감ᅠ시간에ᅠ맞춰서ᅠ문밖을ᅠ나서니ᅠ새벽ᅠ공기가ᅠ스산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ᅠ쓸쓸하고ᅠ으스스한ᅠ기분이ᅠ들었다. 조용한ᅠ거리를ᅠ걸으면ᅠ마음이ᅠ뻥ᅠ뚫릴 줄ᅠ알았는데 오히려 앞이 캄캄하고 속이 답답했다. 오늘도 별 소득 없이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노트북을 덮었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황인찬ᅠ시인의 인터뷰를 읽었다. 시인은 새벽까지ᅠ탐앤탐스에서ᅠ시를 쓰다 아침 첫차가 다니기 시작하면 카페를 나선다고 했다. 시를 쓰기 위해 숱한 날 밤을 새봤지만 고작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나설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어디 탐탐인지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인 옆에 앉아서 그가 백지 위에 쏟아내는 일흥과 도취감을 함께하고 싶었다. 막상 만나면 쑥스러워서 별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초조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ᅠ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몸을 말렸다. 아랫배를 만지면서 한참 거울을 봤다. 여드름 난 턱도 유심히 보고, 군살이 접히고 구겨진 엉덩이도 살폈다. 난 정신적으론 아직 어린데 겉으로 드러난 살갗은 벌써 바짝 마른 데가 흠집까지 나 있었다. 미간에도 큰 주름이 잡혔고 팔자 주름은 작년보다 두 배는 더 짙어졌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윤여정 배우처럼 우아한 주름을 가질 수 있을까. 초조함에 달팽이 나이트 크림을 듬뿍 퍼서 얼굴에 처발랐다. 와플에 생크림을 얹는 것처럼 정말 듬뿍. 내일은 금요일이다. 고로 운동을 쉬는 날이다. 저녁에 헬스장 대신 어버이날이라서 부모님 댁에 들를 생각이다. 효도 선물도 카네이션 대신 두 분을 위한 달팽이 보습 크림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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