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육수는 포기할 수 없겠어
국이 없으면 밥이 허전했다. 우리 할아버지를 닮았나 밥이 영 술술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특히 라면을 좋아했는데 비건을 하고부터는 그 무엇보다 라면을 못먹는게 큰 아쉬움이었다. 라면을 먹지 못하기에 채수라도 끓여먹었는데 것도 영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어느날 일하는 곳 근처에 새로 생긴 국수집 앞을 지나는데 진한 멸치육수냄새를 맡게 되었다. 나는 며칠간 일부러 그 집 앞을 지나갈 정도로 그 냄새에 사로잡혀있었다. 감칠맛이 제대로 나는 잔치국수를 먹는 꿈까지 꾸면서 말이다. 점점 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먹고 싶은게 명확하고 간절해지니 밥을 먹어도 헛배가 부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고작 멸치육수로 이렇게 고통스러울 일인가 싶다가도 멸치육수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가성비 좋은 일인가 싶었다.
나는 나의 고통을 비건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비건이 원래 쉬운 일이 아니라며 다들 몇번씩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고 했다며 나를 위로했다. 아무래도 자기합리화를 위해 친구들에게 물었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멸치육수를 먹을 수 있다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나는 국수집으로 향했다. 수줍게 입장해 어설프게 자리에 앉았다. 멸치육수의 향이 좁은 가게에 가득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테이블에 도달한 잔치국수는 다대기를 넣기 전 순수한 잔치국수였다.
수저를 들었다. 면을 풀기도 전에 국물을 떠 후룩 들이마셨다. 크아, 이맛이다! 냄새로 맡는 것보다 더 진한 육수였다. 이건 진짜야! 나는 서둘러 면을 풀고 국수를 떠 면을 호로록 입에 넣고 국물과 기가막히게 어울어진 국수를 오물오물 씹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짐했다. 멸치만 먹자! 아니, 가끔은 디포리도 허용하자. 그래! 절대 포기할 수 없겠다 멸치육수만은. 아니다. 국수에 김치가 빠지면 안되니까 젓갈까지만 허용하자. 나는 매일 한번 이상씩 국수집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않아 나는 모든 해산물을 다 먹는 비건이되었다.
그때부터 우유와 달걀을 먹지않는 페스코베지테리언이 되었다. 비건을 시작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바다생물 미안, 많이 먹지는 않을게. 이 나약한 인간을 용서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