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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16. 2019

손에 쥔 아보카도의 그 감촉

낯설고 불편한 맛

낯설고 불편한 맛


낯설고 불편한 맛

손에 쥔 아보카도의 그 감촉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식습관 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나는 푸드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생활을 그만둔 후에 식습관 교육 강사로 전향했다. 어떤 사명감보다는 갖고 있는 재주를 살려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방편으로 선택한 직업이었지만 꽤 보람이 큰 일이었다.


식습관 교육은 요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식재료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에 가장 큰 목적을 두고 있다. 대개 자녀들은 함께 사는 어른들의 식성을 닮아간다. 나를 돌아봐도 상황이나 때에 따라 떠올리는 음식들이 부모님의 입맛과 비슷하다. 식탁의 구성을 결정하는 건 어른의 몫이니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안 어른들이 선택한 음식을 먹고 자라며 맛을 학습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식성은 한번 고착되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스스로 식단을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더 노골적으로 익숙한 맛을 찾기 때문이다. 익숙한 맛을 찾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음식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접해본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접한 대표적인 음식은 매생이였다. 생긴 것만 보아도 미끌미끌하고 이끼가 떠오르는 모양새라 처음 보고 적잖이 놀랐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를 하던 때, 상사가 겨울이면 꼭 찾는 음식이 매생이 굴 국밥이었다. 그때 처음 매생이의 존재를 알았다. 상사는 겨울 별미라며 매생이 굴 국밥을 권했고, 영 비위에 맞지 않았지만 선택권이 없던 막내 시절이라 별 수 없이 먹어야 했다. 겨우내 먹다 보니 맛은 어지간히 적응했지만 미끌한 식감과 이에 엉기는 모양새는 여전히 거역스러웠다. 일 년 후 퇴사를 하면서 동시에 매생이와도 이별했다. 이렇게 영영 이별한 음식이 있는가 하면 몰랐던 맛에 이제야 눈이 뜨여 때마다 찾는 음식도 있다. 이 말 끝에 번뜩 아보카도가 떠오른다.


십여 년 전 요리 실습시간에 아보카도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이름이며 생김새는 딱 보아도 이국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겼다. 교수님의 긴 설명이 끝나고 아보카도 살을 조금 떠 맛을 보았다. “아, 이거 무슨 맛이야! 웩.” 부드러운 식감과 오묘한 기름 맛이 엉켜 나도 모르게 그만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가만, 이거 어디서 먹어봤던 맛이다. 미뢰에 저장된 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휴학을 하고 한창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일이다. 일을 마치고 같은 건물인 영어 학원에 다녔는데, 동갑내기인 외국인 강사와 친구가 되었다. “글리! 친구들이랑 크리스마스 파티할 건데 올래?” 영어 실력이 출중하지 못해 은근히 부담되는 초대였지만 그녀를 믿고 가기로 약속했다. 바로 그 날이다. 파티는 각자 음식을 조금씩 준비해 가져와 나누어 먹었다. 준비한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깔아 두고 모여 앉아 자신이 준비한 음식에 대해 돌아가며 소개했다.


한 친구가 과카몰리를 준비했다며 소개했는데 모두 맥주에 딱 이라며 좋아했다. 따로 부연설명은 없었다. 처음 본 과카몰리는 꼭 파란 바나나를 껍질째 으깨 놓은 것처럼 요상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눈에 물음표를 달고 동그랗게 쳐다보니 나초에 과카몰리를 푹 찍어 나에게 줬다. 별로 당기지 않은 모양새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그것을 받아한 입 베어 무는 데, 역시 익숙지 않은 식감과 맛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친구들은 이해한다며 웃으며 넘겼지만 몹시 미안한 순간이었다. “그때 먹었던 게 아보카도였구나.” 그것이 아보카도라는 사실을 혀가 기억하고 있었다. 때때로 잊힌 기억을 소환하는 혀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두 번의 도전이었지만 아보카도 맛의 진가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수업을 끝으로 아보카도와 이별하게 됐다.


“어? 아보카도잖아?” 시장에 가보니 채소와 함께 아보카도가 자리하고 있다. 시장에 아보카도라니. 세 개에 오천 원. 십 년 만 에 다시 마주한 아보카도 맛은 가물가물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크면서도 입맛은 퍽 보수적인 편이라 자꾸 아는 맛, 짐작할 만한 맛만 골라 찾는다. 아무래도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원하는 것을 쉽게 골라 먹기도 하고 실패할 음식은 미리부터 배제하다 보니 편식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좌판을 지나는데 하나에 팔천 원 하던 아보카도 가격이 꽤 저렴해진 것을 보고 한 바구니 사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 책에서 본 얘기가 적잖이 자극이 됐던 모양이다. 그 책은 창의력은 낯선 경험에서 길러진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공간을 걷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익숙지 않은 맛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새로운 생각에 물꼬를 튼다기에 그리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의식하지 않으면 뻔한 선택지 안에 갇히게 된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보카도를 사기로 결심했다.


직접 사는 건 처음이라 휴대폰으로 검색창을 켜 ‘아보카도 잘 고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껍질의 색이 거무스름한 녹색을 띠고 손으로 쥐어 봐서 탄력이 조금 느껴지는 것으로 고르라 했다. 손으로 쥐어가며 아보카도 세 개 를 고르는데 내 모습에 뜬금없이 실소가 났다. 새로운 것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집으로 와 대학 시절 요리 실습 때 만들었던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아보카도를 반으로 갈라 씨에 칼을 툭 찍어 돌리니 씨가 쉽게 빠진다. 껍질과 속살 사이에 숟가락을 넣어 둘을 분리하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접시에 양상추를 뚝뚝 뜯어 올리고 아보카도를 얹었다. 견과류도 한 봉지 뜯어 뿌리고 드레싱을 뿌려 완성했다. 빵에 아보카도 샐러드를 얹었다. 잘 먹을 수 있을까? 내심 손에 진땀이 났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용기를 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어라, 생각보다 괜찮네!” 그 사이 입맛이 변한 건지 시시할 만큼 금세 접시를 비웠다. 불편한 기억으로 남은 맛의 기록을 다시 쓰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이제는 알게 된 아보카도의 맛은 닫힌 문을 열고 나를 새로운 방으로 안내했다. 맛으로 환기를 경험하는 뜻밖의 경험이었다. 때때로 직면한 문제를 풀지 못하고 웅덩이에 갇힌 날들이 이어질 때면 새로운 맛을 찾아 용기를 낸다. 특히 만드는 방법이나 모양새로 지레짐작해 거부했던 음식을 용기 내 막상 맛보면 짐작과 달라 놀랄 때가 많다. 스스로 만든 고정관념에 갇혀 모르고 사는 세상이 얼마나 클지 문밖을 은밀히 상상하게 하는 맛이었다. 아보카도를 고르려 손에 살짝 쥐고 있으면 처음 느꼈던 낯선 촉감이 더불어 생생해진다. 반복되는 일상이 어쩐지 지겹다 느껴진다면 새로운 맛, 불편한 맛을 찾아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떨까.



봄이 전하는 말

아보카도는 검푸른 색을 띠고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을 때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잘 익었다는 신호다. 호리병처럼 꼭지 부분이 움푹 들어간 것보다 둥글고 균일한 모양이 좋다. 덜 익은 아보카도를 샀다면 하루 이틀 정도 실온에 보관해 후숙 하는 게 좋다. 지방 함량이 높아 너무 오래 두면 금방 상하기 십상이다. 반면 잘 익은 아보카 도를 샀다면 신문지에 말아 밀폐 용기에 넣은 다음 냉장 보관한다. 수분에 쉽게 변질되므로 신문지에 싸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크다.


아보카도 오픈 샌드위치

향신료를 적게 사용할수록 아보카도의 고소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소금으로도 부족함이 없으나 기호에 따라 머스터드, 발사믹 소스를 사용해도 좋다.


재료 삶은 계란 1개, 아보카도 1/2 개, 호밀빵, 올리브 오일, 소금 약간

조리순서 ❶ 호밀빵은 살짝 마른 팬에 구워준다. 너무 바삭하지 않게 가볍게만 구워준다. ❷ 아보카도를 으깨 호밀빵에 바른다. ❸ 삶은 계란을 편으로 썰어 올리고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약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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