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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16. 2019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봄의 맛

살랑살랑 싱그러운 봄의 맛

from unsplash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봄의 맛 

푸릇푸릇 미나리나물



평일, 특별한 약속이 없을 땐 점심을 먹으러 작업실 앞 백반집에 간다.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 없이 백반을 시키면 되니 편하기도 하고 딸려 나오는 국과 찬으로 한 끼를 단단히 채 울 수 있어 이만한 곳이 없다. 망원동은 유명한 맛집이 많은 동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일 뿐, 결국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슬금슬금 찾아 들어가기 마련이다.


백반집에 늦게 가면 국이 졸아들어 짠 국을 먹어야 하거나, 다 떨어져 못 먹게 되는 반찬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도 인심 좋은 사장님은 반찬이 좀 아쉽다 싶을 때면 메뉴에 없는 계란 프라이를 따로 한 장 부쳐 내어 주시거나 다음 날 사용하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을 꺼내 구색을 갖춰주시곤 한다. 뜻밖의 특식 반찬이 먹고 싶은 날엔 일부러 조금 늦게 밥을 먹으러 가기도 한다.


오늘은 푸릇한 나물이 상에 올라 있다. 살을 에는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벚꽃 잎이 다 흩어 날아간 지 오랜데 나물 반찬을 보고서야 봄이 왔음을 그제야 실감했다. 때가 되면 오고 가는 계절인데도 때를 알아채며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은 두세 가지 정도 되는 봄 나물이 올랐다. 돌나물, 취나물, 그리고 익숙하지만 도통 가늠이 안 되는 연하고 푸른나물 한 가지. 거듭 맛을 보며 그 끝 맛을 좇아봐도 알 듯 말 듯 감이 오질 않는다. 그사이 이름 모를 나물 한 접시를 다 비웠다.


“사장님, 이건 무슨 나물이예요?”

“돌미나리.”

“지금이 미나리 철이에요?”

“그렇죠. 요즘 미나리가 연하고 맛있을 때죠.”


된장국에도 냉이와 듬성듬성 썬 달래가 한 움큼 들어 있다. 숟가락으로 달래를 국물에 푹 눌렀더니 뽀얀 김을 따라 봄나물 향이 살살 올라온다. 입안에 가득 찬 기대를 달래기 위해 숟가락으로 냉이와 달래를 함께 떠 뜨끈한 국물을 맛봤다. 호로록, 바짝 말랐던 혀뿌리 깊은 곳에서 지난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엔 몰랐던 봄의 맛이다.


어릴 적 엄마는 매년 봄마다 호미와 까만 봉지 하나를 들고 우리 삼 남매와 함께 집 근처 뒷산에 올랐다. 양지바른 곳을 찾아 냉이나 쑥 같은 봄나물을 캐기 위해서였다. 동생들과 나는 엄마를 따라 쑥이나 냉이도 캐긴 했지만, 하얀 토끼 꼬리를 닮은 몽글한 토끼풀 꽃을 꺾어 반지를 만들거나 잎사귀를 엮어 왕관을 만들어 노는데 더 열중했다. 그사이 엄마는 냉이 한 주먹, 쑥 한 봉지 정도를 캤다. 한두 끼 먹을 만큼만 캐면 엄마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셨다. “얼른 내려가자!” 이렇게 캔 쑥은 이삼일 정도 마당 평상에 널어 잘 말린 다음 보관해두었다. 달래며 쑥을 캔 날이면 어김없이 초저녁부터 냉이가 든 된장찌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빠는 향이 참 좋다고, 봄에는 이만한 게 없다며 수고한 엄마를 치켜세워주곤 했다. 그때의 나는 쓰기만 한 냉이 된장찌개를 향긋하다고 말하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봄보다 조금 더 해가 길어질 때쯤, 심심한 입을 달래고 싶을 때 면 엄마는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잘 불린 쌀을 방앗간에서 빻아 온 다음, 쌀가루와 말린 쑥을 대강 버무려 김이 올라오는 찜기에 푹푹 찌면 그만이었다. 그 모양새가 마치 논에 쌓인 눈이 녹아 지푸라기가 보일락 말락 할 때와 비슷했다. 버무리가 잘 익으 면 살짝 움푹한 접시에 담아냈다. 쌀가루와 쑥이 서로 꽉 뭉쳐져 있지 않기에 떡이라고 부르긴 애매한 이 간식의 이름이 쑥버무리라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그제야 떡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애매모호한 생김새 때문이라는 걸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쑥 맛을 알 리 없는 어린 시절엔 쑥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달달한 백설기만 골라 먹곤 했다. 따가운 봄볕에 콧잔등 위 땀 이 송골송골 맺히고 몸에서 흙 비린내 나던 그 날, 그 봄이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달래 된장국을 먹다 쑥버무리에 대한 기억까지 톺아보았다. 요즘은 비닐하우스에서 일 년 내내 재배를 하는 터라 봄나물의 의미가 사라지는 추세지만 이른 봄 야생에서 나는 봄나물이라 야 진짜 맛과 향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철에 난 달래며, 두릅이며, 취나물이며, 돌미나리와 같은 봄나물은 긴긴 겨울을 버텨낸 존재라 그런지 부들부들한 연한 잎마다 땅의 냄새가 깊이 배어 있다. 양념에 버무려 하나의 맛으로 어우러지는 채소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래오래 꼭꼭 씹어 코로 숨을 몰아쉬면 봄기운이 온몸에 스민다. 이렇게 언 땅을 녹인 에너지가 차곡차곡 채워지면 비로소 내게 봄이 찾아온다.


그날 퇴근길, 시장에서 달래 한 묶음을 샀다. 마음과 달리 무엇을 거창하게 하려 치면 시작도 전에 지레 진이 빠지므로 간단하게 봄나물을 즐길 참이다. 간장에 고춧가루, 깨소금, 다진 마늘, 그리고 쫑쫑 썬 달래를 넣고 달래장을 만들어 두었다. 하룻밤 냉장고에 넣어두고 숙성 후 맛보면 더 좋겠지만 산뜻한 달래 향을 즐기려면 지금이다. 냉동고에서 재래 김 서너 장을 꺼내 휙휙 돌려가며 불 위에서 가볍게 구워주고, 뜨거운 밥도 한 대접 퍼 놓으니 그럴싸하다. 달래장 한 큰 술을 흰 밥에 얹어 쓱쓱 비비고 그 위에 구운 김을 올려 한 입 크게 몰아넣으니 콧길을 따라 향이 번진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몸이 나긋나긋해진다. 유순해지는 기분이랄까.


봄의 맛을 언제 알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의 흙내 나는 냉잇국과 달콤 쌉싸름한 쑥버무리가 생각나는 계절임은 분명하다. 때가 돼야 먹을 수 있는 맛이 있듯, 때가 되어야 알게 되는 맛이 있나 보다. 오늘 그 날, 그 봄의 맛이 당긴다.




봄이 전하는 말

달래나 냉이 같은 봄나물은 구입 후 바로 먹는 게 가장 좋다. 대개 잎이나 줄기가 연해 쉽게 무르고 향이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보관할 경우에는 젖은 신문지에 흙이 묻어 있는 채로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밥 두 그릇 뚝딱 달래장

달래장은 여러모로 쓰임이 많다. 삶은 꼬막의 살이나 연한 잎채소를 넣어 무쳐먹거나 밥에 비벼 먹기 좋고, 마른 김에 싸 먹으면 그만이다.


재료

달래 한 봉지, 다진 마늘 1작은술, 고춧가루 1작은술, 간장 5큰술, 깨소금 1큰술, 매실액 1큰술, 참기름 1큰술


조리순서

 ❶ 달래를 잘 씻어 쫑쫑 썰어둔다. ❷ 큰 볼 안에 양념 재료를 분량에 맞게 넣어 고루 섞는다. ❸ 잘 섞은 양념 위에 쫑쫑 썬 달래를 마저 넣고 섞어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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