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어떻게 하지? 우리 집 전기레인지 켜놓고 온 거 같아!"
옆집 아주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열심히 고구마를 삶고 있는 냄비가 혼자 집에 있다. 3시간째 전기레인지 위에서 고구마를 태우고 있다. 바로 옆집에서! 어제 뉴스에서 새벽에 난 불로 10살, 7살 자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서 부재중이었고 거실 콘센트에서 화재가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아! 뉴스를 괜히 봤다. 큰일 났다. 하필 나는 밖에 있는데 옆집에 들어가서 좀 봐달라고 전화가 왔다! 으악!
나는 가끔 옆집에 간다. 그리고 문을 발로 꾸욱 찬다. 이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혹시 문이 열렸나 한번 봐줘요."
신기한 문이다. 가끔 문이 혼자 열린다고 했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들어갔는데 문이 스르륵 열려있다고 한다. 도둑은 아니고 아주 가끔씩 스스로 열리는 문이다.
하루는 집을 나서는 길에 옆집을 쳐다보니 문이 빼꼼히 열려있었다. 아! 이렇게 열리는구나. 냅다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도어록이 '스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안심을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에 '띠리릭?'
소리가 났다. 어라? 놀라서 한발 물러선 나는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옆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셨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둘 다 정신없이 웃었다.
"문이 열린 줄 알고 닫았어요!"
"응~ 나오다가 놓고 온 게 있어서 들고 나오느라고"
다행히 스스로 열린 문은 그 뒤로 보지 못했다. 매우 일시적인 현상이었나 보다.
전기레인지 사건은 다행히 집에 불을 내기 전에 잘 해결이 됐다.
"집 안에 탄내 안 나세요? "
"응, 집에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해. 그 고구마는 못 먹어. 나중에 새로 삶아줄게."
가끔 주시는 군고구마가 맛있었다. 에어 프라이로 구우시는 줄 알았더니 물 없이 익히는 냄비가 있다고 했다. 세상에 냄비 안에 물이 없었다니... 만약 물에 삶는 고구마였다면 , 가스레인지였다면 물이 넘쳐서 가스불을 끄지 않았을까? 어쨌든 다행이다. 그나저나 너무 웃으시는데, 나는 얼마나 놀랐다고요!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이다.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장점은 자연을 마당처럼 이용한다는 것이다. 바로 앞에 하천이 흐르고 피톤치드가 나올 것 같은 수목들이 우거져있다. 새들이 종일 나무 위를 노니는 작은 숲과 물줄기가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복도 너머로 보인다. 아파트를 나와서 작은 신호등을 건너면 놀이터가 있는 공원이 나오고 하천으로 바로 걸어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아파트 높이의 나무들이 병풍처럼 서있는 하천 길을 걸어가면 큰 호수가 나온다. 코로나 시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주말에는 캠핑을 하거나 가볍게 돗자리를 깔고 소풍들을 즐긴다. 평일도 산책하는 인파와 러닝 하는 사람들로 서로 자리를 찾아서 걷는게 여간 붐비는게 아니다.
옆집 아주머니와는 이사 동기이다. 같은 해 한 달 차이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얼굴 인사만 하다가 친해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옆집에 계속 신문이 쌓였다. 이상했다. 하루 이틀 사흘... 계속 쳐다만 보다가 도저히 이상해서 관리실을 찾아갔다. 주말이었다. 옆집에 연락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무뚝뚝한 표정의 비상근무자는 전화번호를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대신 전화를 걸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저 옆집인데요. 별일 없으시죠? 신문이 계속 쌓여서요."
" 아, 네~ 제가 여행을 왔어요. 신문 놓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계속 가져다 놨나 봐요."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돼서 관리소에 와서 전화를 하게 됐다'고 했더니 옆집 아주머니는 고마워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직원은 계속 웃음을 지었다. 복도에 쌓인 신문은 일단 수거를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옆집 아주머니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주 예쁘게 고쳐진 집이었다. 같은 집이지만 우리 집과 많이 달랐다. '인테리어의 기술은 참 마법 같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예쁜 찻잔에 커피를 내리고 간식을 꺼내주셨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진짜 인사를 했다. 그 후로 종종 먹을 것을 주셨다.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주신 적이 있는데 음식 솜씨가 정갈하다고 느꼈다. 간혹 반찬을 만들다 생각나면 건네주신다. "OO 씨 아직 식사 전이지? 이런 거 먹나 모르겠네?" 하면서 전화가 오면 나는 잽싸게 눈에 바로 보이는 빈 그릇을 챙겨 들고 슬리퍼를 끌며 달려간다. 비록 갈 때마다 그릇 크기가 너무 작거나 반대로 커서 민망한 상황이 생기곤 하지만 말이다.
아주머니의 여러 요리 중에 스페셜메뉴는 호박죽이다. 절대 어디에 가서 사 먹을 수 없는 맛이다. 손도 많이가고 한참 끊여야하니 '여름에 더워서 어떻게 만들지' 싶은 요리인데 무리없이 잘도 한 솥 끊여내신다. 노란 호박의 진득함과 달큰함 그리고 강낭콩 고소함까지 입안에서 가득 어우러지는 맛은 일품이다. 금방 든든해진다. 알차다. 한 그릇 다 먹고 나서 인사말을 전할때에는 나의 목소리와 표정을 통해 '너무 맛있으니 또 먹고 싶다'고 간접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사정이 생겨서 명절을 혼자 보낼 때가 있었는데 ,식사하러 집을 찾은 아들내외에게 차려줬던 밥과 반찬을 내 것도 따로 챙겨서 건네주신적이 있었다. 그릇들이 따뜻했다. 명절 전에 냉장고를 미처 채워놓지 못한 탓에 간단히 편의점에서 냉장 주먹밥이라도 사 먹으러 나가던 참이었다. 옷을 챙겨 입고 신발을 신고 있는데 벨소리가 났고 문을 열었는데 쟁반을 들고 서있는 아주머니를 보게 되었다. 너무도 감사했다. 명절 전에 안 좋은 일이 생겼었는데 사정을 알고 생각이 나신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여행을 자주가시는 편인데 집이 비는 동안 나는 신문을 수거하면서 우편물과 전단지를 챙기곤 한다. 관리소에서 날아오는 투표 문자나 중요한 공지사항을 설명해 드리기도 하고, 어디에 가면 뭐가 좋더라 정보를 나누기도 한다. 향이 좋은 원두커피를 사면 나누고, 간혹 신문물(?)을 드리기도 하는데, 요즘 애들 사이에 유행하는 핫한 간식을 드리면 '나도 젊게 해 줘서 고마워'라며 받으신다.
우리는 이제 제법 오랜 시간 이웃으로 잘 지내고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외에는 다른 점이 많아서 매우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요란한 윗집과 무례한 아랫집이 이사를 오고 나니 이웃과 '어떻게 지낼 수 있는 관계인지'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정도면 좋은 이웃인것 같다. 때로는 무심하게 종종 따뜻하게 안부 인사와 음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며 같은 복도를 오가며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