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나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토론 수업을 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어떤 주제든 정치, 경제와 완벽하게 분리되는 주제는 없다. 특히 토론에 관해 설명하다 보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초등학생도 민주주의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잘 대답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정치제도라며 곧잘 대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누구의 것이냐며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답이 달라진다. "대통령이요~"라는 아이들이 많다.
다음 질문에서는 초등학생, 중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생들마저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뭘까요?"라는 질문이다.
"사회주의요." "공산주의요."라는 답이 대부분이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했지요. 반대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지 않고 소수나 한 명에게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라고 하면 그제야 겨우 "독재?", "군주제요?" 같은 답이 나온다.
민주주의란 정치체제이므로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 전제정치 등이라고 설명해 준다. 경제체제의 경우,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북한과 중국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이며, 중국의 경우 자본주의 요소를 접목한 '사회주의 시장 경제' 체제라고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는 답이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이고 남한과 북한이 서로 다른 체제를 띠고 있다 보니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공산당이니 공산주의가 정치체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어른들이라고 완벽하게 알까. 머릿속에 정확한 용어 정의가 되고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 역시 10년 전 토론을 배우고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제야 조금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는 한 국가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다. 한 국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며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것을 국가의 성공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모든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치와 경제다. 그렇다면 정치와 경제가 어떤 모습이어야 국가를 성공으로 이끌까?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A. 로빈슨(James A. Robinson)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는 '제도'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의 상호작용이라고 이야기하며, 책의 결론을 서두에서부터 강력하게 제시한다.
"모두가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 경제 제도가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지배 계층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 포용적인 제도는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유인을 제공한다. 국가 실패의 뿌리에는 이런 유인을 말살하는 수탈적 제도가 있다."(p5)
포용적 제도는 사유재산 보장과 법치주의, 민주주의, 시민과 기업의 자유로운 참여 등을, 착취적 제도는 독재와 권위주의, 폐쇄적 경제, 시민의 정치·경제 참여 제한 등을 말한다. 확고한 사유 재산권, 법질서, 공공서비스, 계약 및 교환의 자유 같은 포용적 경제 제도는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포용적 정치제도가 전제되어야 경제성장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즉, 정치가 제 몫을 다해야 경제도 잘 굴러간다는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 <총, 균, 쇠>에서는 국가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지리적·환경적 조건을 강조했다. 인종이나 문화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유리한 환경을 만난 덕분에 인류 문명의 발전 격차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는 아프리카의 사례를 언급하며 이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유럽과의 돈독한 교류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기회를 활용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적지 않았지만, 척박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아프리카 정부들의 무능함,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 "착취적인 정치, 경제 제도가 끈질기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기나긴 악순환" 때문에 가난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책에서는 한국을 포용적 정치제도와 포용적 경제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언급하며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경제적 포용성이 가능했던 특수한 경우라고 했다. 착취적 정치제도에서도 경제 성장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는데, 군사 쿠데타를 통해 획득한 권력의 견고함,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 혁신을 이끄는 엘리트층의 부상이 두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착취적 정치제도를 갖춘 사회라면 으레 창조적 파괴가 두려워 포용적 경제제도를 꺼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회마다 엘리트층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엘리트층의 입지가 워낙 확고해 자신들의 정치권력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p140)
중국의 사례를 언급하며 점차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과 제도를 버리고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가능했지만, 착취적·권위적 정치제도 때문에 창조적 파괴의 범위가 제한되어서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에 반해 한국은 민주화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치제체에서 벗어나 포용적 정치체제로 전환했고 이 덕분에 초기의 고속 성장이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시민의 정치 참여, 언론의 자유 확대, 중소기업 지원, 복지 확대, 교육 기회균등 등과 같은 정치적 포용성이 경제적 포용성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포용적인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가졌다는 대한민국. 성공한 사례로 언급된 우리나라의 국민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서도 우리나라의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는 견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영원히 견고한 제도는 없다. 어떤 제도든 사람들과 그들이 벌이는 결정적 사건들에 의해 변할 수 있다. 자칫 방심하면 권위주의적 정권과 착취적 경제정책으로 나날이 쇠퇴하는 국가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에 관심 없는 정치, 철학 없이 권력 획득을 위한 악다구니만 벌이는 정치를 보며 정치제도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지금. 경제적 기회가 기득권과 특권층에게 집중되고 극심한 양극화로 경제제도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지금. 국민은 개돼지여서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해 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시민이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개돼지가 맞다고. 어떻게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그런데 우리는 누가 그 문제를 지혜롭고 최대한 공정하게 해결하는지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은 개돼지라고. 나만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평범한 우리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최대한 해결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라고. 까불지 말라고.
토론강사를 하면서 시간을 할애해 교육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유명강사가 아니니 최대한 많은 학생들이 토론을 배우게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세상의 다양한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대화를 나누고,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1년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는 책 읽으라고 강요하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고, 편협한 사고를 주입하는 토론강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읽고 이야기 나누고 나의 생각을 파괴하고 다시 쌓아나가면서 공부하는 시민이 되고 싶었다.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면 정치와 경제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 시민이 많아지면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지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민주화를 이루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세계가 주목하는 아름다운 문화가 많은 나라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갖춰야 하는 의무가 아닐까.
어려운 책이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자신의 인생책이라며 “분배가 공정하지 않은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라고 했다는 전(前) 대통령보다는 더 잘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