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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새로운 군주론을 써가는 중

< 군주론 > - 마키아벨리

by 늘봄유정

2025년. 올해처럼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고민한 해가 있을까. 임시정부부터 시작하면 한국의 대통령제는 고작 100년 남짓한 역사를 갖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1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 14명의 대통령이 선출됐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으며 모르고 지나간 건 또 얼마나 많을는지, 아찔해진다.


독서모임의 두 번째 책이 <군주론>이었다.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에 읽었으니, 꽤 시의적절하게 읽은 고전이었다.


< 군주론 > 은 마키아벨리가 1513년 집필한 책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으며 학자마다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책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냐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각축장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계 복귀를 위한 목적으로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군주론>을 집필했다. 하지만 어떤 목적도 이루지 못한 채 1527년 생을 마감했다.


< 군주론 > 은 총 26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장부터 11장까지는 군주국의 종류와 각 유형별 군주국이 가진 한계를 사례 중심으로, 1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나열하며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들어 설명한다.


여러 덕목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을 정리하자면,


좋은 군대를 갖출 것 (용병이나 원군 대신 스스로의 역량을 키울 것)

끊임없이 군무에 관심을 갖고 훈련과 연구를 할 것

"자신의 무력에 근거하지 않은 권력의 명성처럼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습니다." (p103)


때로는 비난도 감수할 것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입니다.(p109)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인해서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p111)


관후함보다는 인색함을 택할 것

"비난은 받되 미움은 받지 않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더 현명한 방책입니다." (p115)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되, 미움을 받는 존재는 되지 말 것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됩니다."(p117)
"군주가 음모에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책들 중 하나는 인민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p130)


때로는 능숙한 기만자이며 위장자가 될 것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p125)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필요하다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p126)


중립 대신 입장을 명확히 할 것

"군주는 자신이 진정한 동맹인지 공공연한 적인지를 명확히 하면, 곧 그가 주저하지 않고 다른 군주에 반대하여 한 군주를 지지하면, 대단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 정책은 중립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 항상 더 낫습니다." (p154)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일 것

인민에게 적절한 호의를 베풀고 동시에 위엄을 지킬 것

대신의 충성심 확보를 위해 그를 우대하고 재부를 누리게 하며 가까이에 두고 명예와 관직을 수여할 것

필요한 순간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고 경청할 것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의 역량에 기초한 방어책을 구축할 것

운명의 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할 것

시대와 상황을 잘 읽을 것


"냉혹한 통치론", "무자비한 처세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반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면서도 새로운 윤리",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유용한 이야기"라는 우호적인 평가를 받는 책답게 독서모임 참가자들의 평도 다양했다.

"이 책은,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나쁜 책인데 참 많이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은 그것이 가진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 요즘의 국제정세에 시사하는 부분도 있다. 사회생활에서 경영자의 의사결정을 실행할 때 중간자 입장에서 힘들 때가 있다. 위에서는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직원들은 반감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간에서 효율적인 조율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으며 행동방식 역시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현재 상황에 맞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민주공화정인 오늘날 군주제 시절의 이야기를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인 시기가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인데, 당시 조선으로 전해졌더라면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강한 군대와 강한 리더십, 과감성 등을 갖춘 군주로 '체사레 보르자'를 예로 들면서 외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을 간절히 원했던 민족주의자 마키아벨리의 철학이 조선에 전해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모든 게 좌우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맞지 않다. 개별 사람들의 자유의지, 시민의 힘, 여론 형성 등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이상형이 니체가 말한 '위버맨쉬'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위버맨쉬는 '초인'이라는 뜻이다."
"모든 상황에는 맥락이 있고, 맥락을 해석하는 관점이 있구나..."


한 번 읽어서는 도저히 내 것이 되지 않는 책이라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다만 '군주'라는 이름을 이 시대의 '리더'라고 바꾸고 나름의 정리를 해보자면,

"윤리적이며 사랑받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국민을 위해서라면 시대와 상황에 맞게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사람. 외부의 힘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힘과 실력을 키워 국민을 지키는 사람. 전략적 악행로 인한 비난을 감수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국민을 위한 것이었음을, 모든 행위의 진정성을 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이 우리가 원하는 리더가 아닐까.


그렇다면 시민인 우리는, 리더가 가진 진정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지 참 어렵다.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통치자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행한 모든 일들이 진정 국민을 위한 것인지 여부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라는 것이 안타깝다.


202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한참 동안 헛헛했던 기억이 난다. 투표를 끝냈으니 국민으로서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손 털려는 마음은 못된 심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당시 선거가 끝나고 썼던 글이 있다. 다시 읽어보니, 그 찜찜함은 동물적 감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 장맛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

선거, 잔치는 끝났다.
한바탕 시끌벅적한 잔치를 끝낸 듯 허무함과 피곤함이 밀려온다. 누가 되었든 흥겨움만 남는 잔치였다면 좋으련만, 아직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듯하여 아쉽다.

마음이 허할 땐 술이나 잠보다도 일이 최고다. 휴대폰 첫 화면 < To do List >에서 며칠째 지우지 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완성하지 못하고 처박아둔 수업 PPT 몇 개를 마무리했고 시원하게 베란다 물청소도 했다. 가장 큰 일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는데 지난해 담가 둔 된장과 간장을 항아리에서 꺼내 소분하는 일이었다.

올해 담글 메주는 벌써 2주 전에 받아두었건만 여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항아리를 비워야 새 된장을 담그는데, 새 대통령과 함께 산뜻한 출발을 하고 싶었던 건지 선거날까지 미루었다. 무거운 마음을 털고자 오늘에야 일을 벌일 거였다면 서두를걸 그랬다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꾸덕꾸덕 마른 윗 된장을 걷어내니 몽실몽실하고 갓난아기 똥색보다 약간 진한 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 가득 퍼내어 이 그릇 저 그릇에 빈틈없이 담았다. 우리 식구만 먹는다면 3,4년은 거뜬히 먹을 양이지만, 1년 치와 덧장 만들 만큼만 남겨둔 채 여기저기 나누고 털어버린다. 은근 인기가 많은 우리 집 된장, 간장을 대놓고 사 먹겠다며 더 많이 담그라는 이도 있지만 딱 한 말, 내가 맛나게 담글 수 있는 양까지만 욕심내고 만다.

매년 새로 담근 장을 전 해에 담근 장과 섞어두는 것이 덧장이다. 고유의 장맛을 이어가라는 의미이며 그렇게 하면 숙성된 맛이 좋다고 해서 의식 치르듯 하고 있다. 장을 담근 지 십 년 가까이 되는 동안 매해 조금씩 더해졌는데, 몇 년 전 딱 한해를 걸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된장 항아리를 돌보지 못한 그해, 구더기가 항아리 밖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몽땅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특별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겸손을 떨지만 은근한 관심이 필요한 일이 장 담그기다. 볕이 좋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놓아야 한다는데 정신줄 놓으면 비도 들어가고 파리가 알도 깐다. 유리로 된 항아리 뚜껑만 믿고 있어도 사달이 난다. 구수한 냄새를 따라 어떤 놈이든 미세한 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망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은 뒤 고무줄로 고정하고 유리 뚜껑으로 한 번 더 꾹 닫아주어야 안심이 된다. 옹기는 숨 쉬면서 습도를 조절한다고 하니 항아리 겉면도 깨끗이 닦아주어야 한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항아리는 주인의 게으름뿐 아니라 날로 먹으려는 못된 심보의 상징이다.

투표를 끝냈으니 국민으로서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손 털려는 마음 역시 못된 심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데 말이다.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달군 숯을 넣고 대추, 마른 고추를 넣었다고 해서 벌레가 안 꼬이는 게 아니다. 망으로 한번, 뚜껑으로 한번 덮었다고 해서, 깨끗이 닦아주었다고 해서 저절로 맛있는 된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하고 가끔씩은 손끝으로 찍어먹어 보기도 해야 한다. 장맛이 변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장을 망치면 시판 장이라도 사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치는 잘못되면 대체재가 없다. 그러니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치 무관심은 선거날 하루의 기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의 부재를 말한다. 속 시끄럽다고 리모컨 끄듯 신경까지 꺼버리면 안 된다. 앞으로 1년을 지켜보며 평가하고 그다음 1년, 또 1년, 그렇게 계속 돌봐야 한다. 그 어느 한해도 버리지 말고 덧장으로 쌓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훌륭하게 숙성된 장맛 같은 우리를 발견하지 않겠는가. (2022년 3월 11일)


2025년 6월, 우리는 3년 만에 새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정신없던 몇 달을 보낸 후에 치러진 선거였다. 너덜너덜해질 만큼 지쳤지만 유권자의 79.38%가 투표를 했고 49.42%의 득표율로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사회분열이 어느 때보다 극단적이고 세상이 더 좋아질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사그라드는 시대다. 강대국의 압박은 더 거세졌다. 그 앞에 서게 된 리더다. 유권자 절반의 선택이더라도 위임받는 권력은 100% 인 자리. 잘해봐야 본전이 아니라 뭘 해도 먹게 되는 욕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 그 무게를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 지난번 선거 이후와 같이 이번에도 우리는 1년, 2년 계속 지켜보고 평가하고 지지하고 비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들수록 더 단단해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선거 한 번 치를 때마다 정치와 함께 성장하는 중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덕목인지 새로운 군주론을 써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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