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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캐리어로 만든 엄마의 시간

by 다우

“아, 그게 앵두 아빠였어요?”

“네, 맞아요. 저희 남편이었어요.”

“앵두 아빠가 메고 다니는 것 보고 우리도 사려고 했잖아요. 그리고 엄마는 대체 뭐 하길래 아빠 혼자 애 둘을 데리고 다니는 지도 궁금했어요.”

내가 애정하는, 마녀 체력의 소유자인 이영미 작가님조차도 아이가 어릴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 시기는 기억조차 흐릿하다고 했다. 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나는 약골임에도 어떻게든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체력을 쌓으며 엄마라는 사람도 찾아가며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친정과 시댁의 도움 없이, 남편과 둘이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들과의 시간을 지키려는 하루하루가 사투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 엄마의 운동을 챙기는 일은, 엄마 혼자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중심에는 단연 남편과 아빠의 육아휴직이 있었다.

눈앞의 수익을 보면 녹의 육아 휴직은 영 우리 가계에 도움이 안 됐다. 하지만 멀리 보기로 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언젠가’라는 말로 미루기에는 지금이 가장 눈부시게 젊고 건강한 순간이었다. 하루라도 젊고 건강할 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남편의 육아력을 키우고 싶었다. 나아가 엄마의 시간도 깊어지고 싶은 사심 또한 있었다.


녹이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왔을 때 가장 큰 문제는 '공포의 이단분리'가 되는 것이었다. 몸도 잘 못 가누는 아이들이 각자 관심사가 뚜렷하게 달랐기 때문에, 어느 한 명을 따라가면 다른 한 명은 놓칠 수밖에 없어 아이 둘을 한 명이 동시에 돌보기란 늘 긴장의 연속이라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아빠가 살아남을 육아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녹은 잔머리를 굴려 해결책을 찾아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첫째와 함께 서울 둘레길을 정복해 보자며 샀던 육아템이 있었다. 바로 등산캐리어였다. 등산 외에는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잠들어 있던 등산 캐리어의 쓸모를 찾았다.

한 때 유모차 거부의 대명사였던 첫째는 이제 유모차의 편한 맛을 즐기는 4살이 되었고, 뒤늦게 걸음마를 시작한 앵두는 걷는 재미에 빠져 유모차는 거부했지만, 아빠의 등산 캐리어에 올라타 동네 구경만큼은 즐겼다. 한 명은 등산 캐리어에, 다른 한 명은 유모차에 태우니 아이들의 공포의 ‘이단 분리’를 막아주는 완벽한 해결책이 되었다.

나 혼자라면 아이 둘을 데리고 반경이 아파트 내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녹은 달랐다. 아파트를 벗어나 카페거리를 지나 더 멀리까지 아이들과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그때마다 녹은 항상 등산 캐리어와 함께였다. 앵두가 8개월 차에 내가 등산 캐리어에 아이를 메고 갔을 때 어깨가 빠질 듯 아팠던 기억이 생생해서 걱정이 되었다. 15개월이 넘은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육아를 하루 이틀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면 지속하지 못할 것 같아요.”걱정스레 말 말하니 “나는 몸이 고생해도 이게 마음이 편해요.”라고 녹은 대답 했다.


그렇게 녹은 ‘등산 캐리어를 맨 남자’가 되었다.


전에도 아빠가 아이 둘을 돌보는 것은 같았지만, 등산 캐리어가 주는 시각적인 임팩트는 강렬했던 모양이다. 엄마들은 남편을 보고 ‘대단하다’고 말했고,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남편이 복직한 지 1년이 넘었음에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한 엄마가 “앵두 아빠가 메고 다니는 걸 보고 우리도 등산 캐리어를 사려고 했어요.” 말하게 되었다.


엄마는 결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빠는 아이들과의 시간을 늘려갔다. 때로는 아이들의 꼬질꼬질한 얼굴과 파김치가 된 남편을 보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하고 난 후에 나는 공부와 운동까지 하는 걸까?’하며 흔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이 시간을 잘 견뎌야 남편의 육아력이 상승하고, 아이들도 아빠와의 애착이 깊어질 거라 믿었다.


아빠의 육아휴직을 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그 1년의 시간 동안 육아력이 드라마틱하게 상승했다고 말하고 싶고, 엄마의 시간도 철저하게 보장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여전히 ‘달리는 엄마’로 남아 있다는 것. 그건 단지 내 의지로만 된 일이 아니다. 남편이 짊어졌던 그 캐리어는 결국 나의 시간도 함께 짊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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