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위해 경청 좀 하고 살아요. 우리
종종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과 지내다 보면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낄 때가 있다. 반려견들은 앉아, 손, 기다려, 이리 와, 밥 먹자, 산책 가자. 등등 주인이 하는 말 일부를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모르는 말이 있으면 고개를 갸웃, 갸웃 거리며 주인을 바라보곤 한다. 원래 강아지들은 고개를 갸웃둥하는 행동이 없었는데 사람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람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생긴 새로운 행동이라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사람과 다른 동물 사이 언어를 통한 교감을 신기하고 놀라워했다. 그런데 요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이 AI나 전자제품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어를 통한 교감은 전보다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아이들의 말하기와 듣기 능력에 관해 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에 비해 말하기 능력은 너무나 탁월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는 듣기 능력은 많이 떨어진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요즘 사회에서는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말해야지만 손해 보지 않고 살아간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듣기 교육보다는 말을 잘하는 교육을 많이 시킨다는 내용도 함께 적혀있었다. 처음에는 이 기사를 보고 '정말 그런가?' 하며 불신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일터에서 기사 속에서 본 아이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놀이공원의 범퍼카라는 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겪은 상황이다. 놀이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는 키를 아슬아슬하게 넘은 한 남자아이가 범퍼카를 타던 도중 손을 들었다. 운영 도중에 차가 움직이지 않거나, 운전 방법을 모를 때 알려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마이크에 대고 운영방법을 알려주었다. 차의 왼쪽 부분이 벽에 부딪혀 있었기 때문에 핸들을 살짝만 오른쪽으로 돌리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친구, 핸들을 오른쪽으로 두 바퀴만 돌려주세요."
하지만 남자아이는 핸들을 돌리지 않았고, 의미 없이 핸들을 흔들며 주변에 있는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한번 더 친구를 향해 핸들을 오른쪽으로만 돌리면 나올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남자아이는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며 계속해서 내 말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결국 나는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잠시 자리를 맡아달라 부탁한 후 남자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남자아이에게 직접 다가가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아는 나를 신경질적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나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다른 손님 분도 있고, 차에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기에 전체 운행을 정지하지 못했고 결국 남자아이는 차를 벽에 붙인 채 3분을 보내야 했다. 운행이 끝난 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남자아이의 차로 시범운행을 해본 결과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이 없었기에 남자아이는 대기라인을 바로 지나 화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화가 잔뜩 난 아이는 자신의 가방을 차에 던지면서 자리에 앉았고, 아이의 속상한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가가 운전방법을 따로 설명해주었다.
"친구, 만약 또 운전이 어려우면 직원의 말을 들어주세요. 어떻게 하는지 도와줄게요."
남자아이는 또다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듣고 있었어요! 내가 귀가 먹은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할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아이가 정말 미워졌다. 남자아이의 말은 참 모순적이었다. 듣고 있었으나 행동은 내 말과 전혀 반대였고,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은 경청과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아이는 다음 운행에서도 운전을 잘하지 못하였고 또다시 차를 벽에 붙인 채 퇴장해야 했다. 나는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위에 써 놓은 기사가 떠올랐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놀이공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 남자아이와 같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많이 본다. 아직 어린 나이에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말을 잘 들어주는 아이들을 볼 때면 크게 차이가 나기에 단순 투정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작은 생각이다.
사실 일할 때 말 안 듣는 어른들이 훨씬 많다. 사회에서도 자신의 주장만 펼치며 말이 안 통하는 어른들이 참 많다. 많이 들어 본 말이겠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속에서 자라나는 작은 미래다. 스피킹 학원은 많지만 경청 학원이 없는 것처럼 요즘 사회의 모습을 천천히 둘러보았을 때 전반적으로 말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듣기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생기는 이유는 말 잘하는 어른들만 보고 자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듣는 능력이 뛰어나야 말을 조리 있고, 품위 있게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리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게 되고, 슬프지만 나의 말은 그저 시끄러운 외침이 되어버린다. 이제 말 안 듣는 아이를 탓하기만 할 시기는 지났다.
너무 나아간 생각일 수도 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서 듣기 능력이 퇴화된다면 언젠가 인간이 태어났을 때 더 이상 귀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없는 것은 사라지고, 쓰는 것은 더 발달되는 것이 진화이기에 지금의 작고 귀여운 두 귀를 지키고 싶다면, 우리는 아이들이 볼 수 있게 말하기와 듣기의 조화로운 능력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20년 뒤 당신의 귀는 안녕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