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무한하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될 것 같은 일은 애초에 손을 대지 않는 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뚜렷한 미래가 보장되어있지 않은 작가라는 꿈을 꾸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 쓰는 재미와 근자감으로 작가라는 꿈을 순수하게 꿈꾸었지만 글을 쓰면서 체감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적인 요소에 계속해서 순수하게 꿈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법이기에 잠시 꿈을 접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꾸준하게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해도 돌아오는 소식이 없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글쓰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떨어질 건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쓸 필요가 있을까? 시간 낭비가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 글에 대한 무반응을 받아들이는 것에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잠시 글 쓰는 일을 접고, 무작정 돈을 벌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가끔 일을 하다가 떠오르는 영감이나, 인상 깊은 상황을 짧게 메모하는 거 이외엔 아예 글을 쓰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다른 꿈을 찾아보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 꿈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전 날 눈이 많이 와 길가에 눈이 가득히 쌓여있어 유독 길이 미끄러운 퇴근길이었다. 눈을 밟는다는 즐거움보다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긴장하고 걷고 있던 중 앞에 엄마와 장난을 치며 걸어가는 남자아이를 보게 되었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던 아이였는데, 눈 속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는지 발을 눈 여기저기에 딛으며 장난치듯 걸었다. 그러나 길가에 쌓인 눈은 이미 사람들에게 많이 밟혀 단단하게 굳은 상태라 남자아이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아이는 속상해하며 엄마 손을 잡은 후 다시 제대로 걸어갔고, 남자아이가 남기는 발자국은 나만 볼 수 있었다.
남자아이가 잠깐 밟은 눈은 눈이 없는 보도블록에 떨어지며 하얀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보도블록에 남은 남자아이의 발자국을 보며 "잠깐 밟은 눈도 저렇게 발자국이 남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글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던 건지, 잠깐 밟은 눈이 남긴 발자국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레 글쓰기와 연관되어 생각이 들었고 그 후 나는 조금씩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낭비일까 두려운 마음이 아예 사라진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적어두었던 글과 노트에 메모해둔 것들로 글쓰기를 꾸준히 하다 보니 3년 전부터 꿈꿨지만, 포기하고 있었던 브런치 작가라는 작은 발자국을 하나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상상과 다른 나의 모습을 마주할 때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쉽게 좌절하고, 핑계를 만들어 포기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낭비된다는 생각에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기대와 다른 내 모습에 겁이 나 도전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당장은 하찮고, 아무런 이득이 없어 보이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른 결과가 보일 때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삶에서의 시간 낭비가 아닌, 내가 삶에서 만들어 가는 발자국 중 하나인 것 같다.
단단하고 얇은 눈을 밟았을 때 당장 그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진 않지만,
그 자리를 지나쳐 걸어가는 길에는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