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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May 11. 2024

전 배달의민족 CBO 장인성님을 만났습니다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2013년, '배달의민족'을 만드는 우아한형제들에 입사해 올해 3월까지 최고 브랜드 관리자(CBO :Chidf Brand Officer)로 일하신 장인성님을 만났습니다. 책 <마케터의 일>을 썼고, 강의나 인터뷰도 자주 해오셨기 때문에 마케터로 일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그의 이름을 접해보셨을 것 같은데요. 그는 얼마 전 자신의 SNS를 통해 깜짝(?) 퇴사 소식과 함께 성수동에 '장인성의 말랑한 오피스'라는 이름의 팝업 오피스를 차렸다고 전했습니다. 오피스에서는 일주일에 4번, 사전 신청을 통해 '인성상담소'가 진행되는데요. 저의 고민이 채택되어 장인성님을 만나고 오게 되었습니다.

경력 10년차에 접어들며 저는 많은 고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니어 때부터 지금까지는 주어지는 기회를 잡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그 기회가 만들어준 길만 따라왔어요. 경험도, 스킬도 부족했으니 주어진 기회라도 잘 잡고 이어온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10년차 이후부터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뭐랄까, 이제부터는 좀 더 뾰족하게 나의 커리어 패스를 그려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그 뾰족함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의 고민은 장인성님을 만난 후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무계획적인 퇴사 이야기를 듣고 말이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가 뚜렷한 계획 없이 퇴사를 했다는 점이었어요. 물론 대기업의 임원으로까지 일하신 분이니 당장 퇴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왠지, 그 정도의 경력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퇴사 후 무엇을 할지 정해두고 퇴사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의 생각과 달리, 오피스는 말 그대로 언젠가는 종료될 '팝업' 형태이고, 오피스 안에서 진행되는 '인성상담소'나 '책감옥'과 같은 일들도 기획이 확정되어 보이지 않았어요. 마치 소속이 없는 삶에 조금씩, 천천히 적응해 나가며 확정되지 않은 상태를 즐기는 듯해 보였죠. 

뚜렷하고 뾰족한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연필의 나무 껍질을 벗겨야 뾰족한 심이 나오듯, 뚜렷하고 뾰족한 것은 서서히 드러나는 무언가라는 것을 그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은 뾰족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뾰족함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이 맞는지 끊임없이 체크하고, 한겹한겹 나무 껍질을 벗겨나가는 노력일 테지요.


배달의민족은 작년 7000억원 가까운 이익을 거두며 한국 스타트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혁신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초창기에는 이렇게 큰 회사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배달앱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고 결제까지 한 번에 할 수 있지만, 배달의민족 출시 당시에는 고객이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면, 운영팀이 직접 식당에 전화 주문을 해야 했습니다.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자동화하기 전에 이러한 시나리오가 잘 작동하고 사업성이 충분한지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무수히 많은 테스트와 원시적인 노동(?)을 통해 완전한 서비스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죠.  


인성님은 회사에 다닐 때에도 팀원들이 어려운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와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상담소는 1차적으로 팀원들을 돕기 위한 일이었지만, 반대로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을 거예요. 팀원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아는 것 또한 최고 브랜드 관리자의 역할일 테니까요. 그가 회사 안에서 해오던 상담을, 회사 밖에서도 이어가는 이유 역시 비슷했습니다. 마케팅 업무 관련 고민이라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테고, 마케팅 관련 고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배달의민족 바깥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그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인성상담소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자양분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무계획적이지만 누구보다 성실히 나무 껍질을 한겹한겹 벗겨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저는 스스로 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뾰족한 미래를 계획하려고 하지 말고, 뭉툭한 나무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 봐. 그러다 보면 언젠가 뾰족함이 드러나 있을 거야.'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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