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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진 Jun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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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최근 <한국 요약 금지>라는 책을 쓴 뉴요커 작가 콜린 마샬은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책을 쓴 계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요약하면 그 재미가 떨어지는 것처럼, 나라나 사회도 요약하면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직접 '경험'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했죠. 그는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이 흥미로운 나라라고 말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모국을 흥미롭지 않다고 느끼기 마련이니까요.


수학 공식처럼 박혀버린 드라마나 영화의 흐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TV나 영화관에서 콘텐츠를 즐기지 않고 유튜브를 통해 요약된 '짤'을 봅니다. 1시간 짜리 드라마나 그보다 더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단 10분 이내의 콘텐츠로 요약해서 보는 것이죠. 대략적인 줄거리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짧은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이 터지는 등 감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긴 시간을 투자해 드라마나 영화의 전체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가끔 집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거나 딴청을 피우고는 합니다. 그러다 영화가 끝나면 머릿속으로 '재밌네', '재미없네' 정도의 감상만 남고 쉽게 휘발되는 것 같아요. 반면, 영화관에서 무척이나 지루하지만 티켓값이 아까워서 엔딩 크레딧까지 꾹 참고 본 영화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인데요. 3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지만, 기억에도 무게가 있다면 이 영화는 제 머릿속에 무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집안일을 하거나 딴청을 피우며 본 영화는 재미없다고 느낀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오펜하이머>는 내가 왜 재미없게 느끼는지 최소한 3가지 이유를 들며 조목조목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정보는 점점 더 많아지고 더 빠르게 변화합니다. 정보를 더 많이, 더 빠르게 습득하는 사람이 이기는 경쟁 사회에서, '요약'은 '실패'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기술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느라 시간을 버리는 실패를 피하기 위해, 재미없는 여행지에서 돈을 낭비하는 실패를 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요약한 짤을 보고, 블로그 글을 검색하죠. 



한국을 요약하고 싶지 않아요.
한국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 콜린 마샬



콜린 마샬이 말하기를, 미국 매체에 비치는 한국은 '디스토피아' 같다고 합니다. 자살, 경제적/학업적 압박감, 공장식의 K-pop 트레이닝 등 마치 '오징어 게임' 그 자체처럼 그려진다고. 하지만 그가 직접 한국에 살면서 느낀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더 선진국 같았습니다. 미국 매체에서 요약한 한국의 모습만 보고 믿었더라면 진정한 한국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요. 


최근 우연히 지인들과 영화 <오펜하이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화를 재미없게 본 이유에 대해 말하며 재미를 느끼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재미가 있었던 걸까요, 재미가 없었던 걸까요? 재미가 있든 없든, 제가 이 영화를 제대로 '경험'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콘텐츠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일글레'입니다. 일글레 구독 하시면 매주 수요일마다 이메일로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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