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품력(1)
종종 대행사 출신이 브랜드사로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을에서 갑으로의 변화일 수도 있고, 광고에서 마케팅으로의 업무 변화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자리에 무난히 적응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봅니다. 조직 문화의 차이, 정치적인 희생이나 따돌림 문화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업무로 좁혀 이야기해 보면, 마케팅을 대하는 관점의 간극이 있습니다. 광고인으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기획하고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온 일과 마케터로서 제품을 기획하고 가격, 채널, 홍보 전략을 세우고 관리하는 일은 엄연히 다릅니다.
조직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브랜드사의 사람들은 제품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합니다. 제품의 캐릭터, 반응, 개선점 등이 R&D, 영업, 유통, 생산과 맞물려 각각의 언어로 모이고 흩어집니다. 물리적 실체에 바탕을 둔 언어이자, 제품을 평가하는 신체 감각적 언어가 중심이 됩니다.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겐 용어 자체가 낯설어 대화에 끼기 쉽지 않습니다. 제품을 처음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대행사의 사람들에게 제품은 상수입니다. 정해진 제품의 조건 하에서 차별점을 찾아 컨셉화하고, 비용을 태워 노출, 전환을 유도하는 일을 합니다.
마케터에게 제품은 변수입니다. 모든 업무의 출발점입니다. 제품은 유동적입니다. 이미 시장에 유통되는 제품일지언정 품질이 틀어질 수 있고, 생산 과정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비용 이슈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며 제품, 브랜드를 관리하는 일이 마케팅의 핵심 업무입니다. 그래서 몇몇 회사는 마케팅 부서의 인원들을 Brand Manager라 부르기도 합니다.
제품력, 영업력, 관리력. 제가 뵈었던 모 기업의 CEO께선 회사의 경쟁력을 이렇게 3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고, 이를 능력 있는 영업팀이 시장에 파는 것. 그 과정 상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비용 효율성을 높이는 것. 영업력은 영업부서, 관리력은 경영관리, 유통부서의 몫일 겁니다. 제품력은 R&D, 생산(공장)의 몫이 크죠. 마케팅도 한 자리 차지합니다.
이미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제품이라도 제품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1.
시장 모니터링은 기본입니다. 우리 제품이 꾸준한 회전을 보이고 있는지, 신선도가 떨어지거나 재고가 늘어나고 있진 않는지, 그렇다면 경쟁사의 움직임이 원인일지, 소비 패턴의 변화일지, 보다 매크로한 경제 환경의 변화일지 등 다양한 변수를 분석하고 원인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2020년은 전지구적으로 큰 변곡점이었습니다. 코로나의 시작이었죠. '19년 말부터 이상 조짐을 보이다 '20년 설연휴를 전후해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느꼈던 위기는 대단했습니다. 많은 기업이 코로나의 확산세와 중국 정부의 강력한 봉쇄 대응에 매출 목표를 수정했습니다. 오리온을 포함한 식품기업들도 마찬가지였죠. 가동률 저하를 예상하고 원부재료 재고 처리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오리온이 잘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실시간 판매 데이터(POS)와 연동된 생산-재고 관리 시스템입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상당한 양의 POS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한정된 채널이나마 대형마트와 편의점을 중심으로 실시간 판매 데이터를 주/일단위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POS 데이터 그래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임을 발견합니다. 떨어질 거라 예상했던 데이터가 반등합니다. 일시적이지 않은 2주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전사적 대응 미팅이 소집됩니다. 제품 생산을 위한 재고를 비축하고, 생산량을 늘리기로 합니다. 가능한 물류체인을 확보하고 영업은 유통사와 보다 적극적 상황파악에 나섭니다. 봉쇄의 가능성이 언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집에 비축할 먹을거리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기업은 준비가 늦었고, 오리온은 매출 방어에 성공했던 사례입니다. 꾸준히 시장을 살피는 것만으로 기회를 찾고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2.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 관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똑같은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도 시점에 따라, 생산자에 따라, 납품 원료에 따라 품질의 차이가 생깁니다. 생산 라인이 다르거나 공장이 다를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죠. 제품 품질 관리를 위해 생산과 R&D가 제조 과정 상의 표준화된 수치들로 기술적인 접근을 한다면 마케팅에서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감각적 테스팅을 병행합니다. 담당자가 주기적으로 제품을 평가하고 때로 외부 조사를 통해 결과를 수치화하기도 합니다. 생산량이 많은, 빅브랜드의 제품일수록 이러한 품질 관리는 필수적입니다.
소비자들은 무섭습니다. 평소 애용하던 제품의 품질이 변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을 때, 이를 이야기해주지 않고 그냥 버려버립니다. 너무나 쉽게 경쟁 브랜드로, 대체제로 옮겨갑니다. 제품력에 있어서는 '넘어갈 수 있는 작은 실수'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제품을, 더 나아가 브랜드를 갉아먹는 행위입니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고 팔리는 펩시코(PepsiCo)의 LAY'S 감자칩은 감자칩의 모양, 크기, 두께, 색깔의 표준을 규정해 두었습니다. 염도와 크리스피(바삭함)를 수치로, 관능 테스트로, 깨물었을 때 깨지는 조각수로 이야기합니다. 그런 기준들이 모여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지킵니다.
3.
제품에 꾸준한 뉴스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매일 시장에는 새로운 제품, 서비스가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새로운 것에 이끌리기 쉽죠. 애용하던 제품이라도 변화가 없으면 지루해집니다.
광고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품의 변화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뉴스입니다. 내용물을 업그레이드하고, 맛과 향을 바꾸는 것. 제품의 사이즈, 용량에 변화를 주는 것. 패키지 디자인을 바꾸거나 IP를 적용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제품 뉴스입니다.
특정 시즌에 따라, 경쟁사 대응 목적으로, 제품의 Re-vitalization을 위해서 등 사유는 다양합니다. 소비자의 관심을 끈질기게 붙잡기 위한 노력입니다. 변치 않을 것 같은 코카콜라지만 끊임없이 제품 뉴스를 더해 왔습니다. 레몬맛을 내었고, 건강 트렌드에 맞춰 Diet를, ZERO를 출시했습니다. 새로운 사이즈와 재료의 패키지를 추가합니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시즌을 빌미로, 특정 스포츠나 이벤트와 엮어서, 스타 마케팅으로, IP를 활용해서, 타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패키지를 바꾸고, 프로모션을 묶어 소비자를 유인합니다.
비단 제품만의 노력이 아닙니다. 금융 플랫폼 토스는 새로운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추가합니다. 무료 환전 서비스와 같은 금융 연계 상품은 물론, 토스 만보기를 통해 포인트를 쌓아주는 앱테크 상품을 내놓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사용자를 묶어두고(Lock-in), 리텐션(Retention) 시간을 늘리는 서비스 상품을 통해, 실제 매출을 견인하는 본 상품으로의 전환을 늘리려는 목적입니다.
변덕스런 소비자를 지속적인 제품 뉴스로 잡아두려는 노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