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다세대 주택은 방 두 개 혹은 세 개의 2층으로 지어진 빨간 벽돌집을 떠올릴 수 있다. 도톰한 네모네모 유리 현관문을 열면 통로를 따라 부엌이 연결되고 통로의 왼쪽에는 문간방, K 장녀 방과 오른편에는 가장 사이즈가 큰 안방, 그리고 부엌 맞은편에 가장 작은 막내 방이 있다. 혹은 통로의 오른편에 안방, 부엌 맞은편에 아이방이다.
거실이 없으니 제일 큰 안방이 거실 역할을 하게 된다. 온 가족이 모여서 티비를 보고 식탁이 아닌 밥상을 차려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먹는 곳, 혹은 네 식구의 철 지난 짐이 켜켜이 쌓이는 곳으로써 안방은 이미 한 가지 이상의 용도를 지녔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넉 자 짜리 장롱 안에는 외할머니가 손 바느질로 만들어준 옛날식 솜이불이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면, 왜인지 동물의 머리와 발, 꼬리까지 그 형태를 보존하여 제 입으로 와앙 제 몸뚱이를 물어 고정하는 밍크 목도리도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할머니의 유품이었던 것 같다.
멀리 시집간 막내딸이 추위에 떨까 밤을 새워 공작 뜨기로 잘 만든 니트 조끼도 잠자고, 역 시즌에 잘 사서 겨울이 올 때를 기다리는 새 패딩 코트가 잘 있는지 나는 종종 꺼내 입어보곤 했다.
쓸모를 다 한 물건을 버리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지만, 추억을 공간에 맞춰 버려야 하는 건 서글픈 일이다.
하다 못해 회사에서도 공간을 줄이기 위해 사외문서보관 신청을 받아 5년이 채 지나지 않은 만 원짜리 법인카드 영수증도 보관하는데,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오며 보관하고 싶은 것이 없겠는가?
내가 살아온 시간이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슬픈 일이다. 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그간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과 좋아해서 표지가 닳도록 읽은 동화책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차서 혹은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동네 어린아이들에게 줘버린 동화 전집이 그 아이들의 낙서장이 되었을 때도 맘은 아팠다. 30년이 지나도록 ‘비 공주’에 귤색 크레파스로 칠해진 난잡한 낙서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이의 부모들은 썩 잘 그린 그림이라고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마당에 피던 노란 꽃 아래서 연례행사처럼 입고 사진을 찍었던 노란 아동용 원피스도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사진으로나마 추억하는 시간도 언젠가는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 생을 다 산 허탈한 기분이 든다.
외할머니의 이불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엄마의 집념은 4번의 이사 동안 지켜져 왔다. 우리 엄마의 어머니 세대는 전쟁에 이불을 가지고 피난을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였던 이모가 이불을 가져가야 하니 엄마를 버리고 가자고 해, 막내였던 엄마가 꺼이꺼이 울었단다.
그런 '이불'을외할머니가 엄마 시집갈 때 새로 만들어 준거다. 아마 엄마는 할 수만 있었다면 평생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네 번의 이사 동안 묵묵히 오동나무 장에 잠자던 그 이불이 시장 솜틀집에서 두 개의 이불이 되어 우리 자매의 겨울 이불이 되었고, 6번의 이사 후엔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우리는 먹고 살길을 찾아 부모님의 둥지를 떠났고, 엄마는 남아있는 자신의 시간을 위해, 한 해에 한두 번씩 살아온 시간을 정리하고 있다. 이제 공간의 제약은 없어졌으나 엄마에겐 시간의 제약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랜 공간의 제약이 우리 가족에게 미친 영향력은 단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어디 둘래? 머리에 이고 있을 거야?”
우리 가족은 가구와 가전을 살 때 가격보다도 ‘둘 곳’과 나중에 ‘버릴 것’까지 염두에 둔다. 나는 게다가 혼자 오래 지내다 보니, ‘혼자 힘으로 옮겨 밖으로 내다 버릴 수 있는가?’ 또한 고려하는 편이다.
물건이 쓸모를 다할 때까지 잘 보듬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사용하는 것 또한 취향을 넘어 공간의 제약이 허락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내 공간을 누가 봤을 때 ‘9만 원스러움’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또한 조금은 서글픈 일이다.
제약된 공간에서 꿈이 구겨지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하녀 방이니 홍콩 메이드 방이니 말도 안 되는 공간에 사람을 욱여넣는 야만적인 행태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말 같지도 않은 서울 곳곳의 원룸을 떠올려 보자.
잠만 자는 방, 부엌과 화장실이 공존하는 사방이 타일인 공간, 그리고 사방이 어두운, 창 하나 없는 고시원.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생을 안 하려고 해, 우리도 다 이렇게 살았어요-
니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나까지 니들이랑 똑같이 살아야 되니? 니들은 그런 방에 월세 45만 원/ 관리비 별도로 주고 살았니?
야박이 아니라 천박이다.
공간이 제약되면 가장 먼저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나다. 내가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인데 제일 먼저 나를 포기한다. 이부자리 하나 펴는 공간에 누워 잠을 자고, 붙박이 책상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최소한 음식은 의자에 앉아서 먹을 테니까.
긴 옷엔 이미 구김이 가고 접어 놓은 셔츠를 매일같이 다려 입는 것은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구김이 가지 않는, 다림질이 필요 없는 소재를 고른다. 어느 날 옷장을 열어보면 내 취향이 아닌 것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내 취향이 아닌 것들을 선물 받기도 한다.
“전에 보니까 이런 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아닌 것들로 채워진 공간에서 눈을 뜨면, 여기 사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식되어 우울해진다. 그리고 볕 하나 안 든다면, 우울한 시간이 채 날아가지도 않은 채, 늘 어두운 새 아침을 맞이한다. 그런 매일 속에서 나를 지켜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기란 매우 힘겨운 일이다. 이런 몇 해가 쌓여 이제는 생일을 알려주지 않는 내가 되었다. 생일에 받은 선물을 열어보는 게 우습게도 두렵다.
엄마의 방이고 거실이며, 창고였던 안방에 말도 없이 데려온 친구들에게 한 상을 차리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는 엄마를 떠올린다. 그 해에 친구들을 불러놓고 안방에서 맞이한 생일을 기억한다. 라면 한 냄비에 두 친구와 안방을 점령한 시간에도 엄마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다. 가족에게 내어준 공간에 자신을 내려놓은 엄마가 식탁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독서 밖에 없었다. 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식탁에서 사라락 넘어가던 엄마의 책장에게 여전히 미안하다.
찜통 같은 '9평 반'의싱크대 식탁에 앉아, 바람 한점 불지 않아 미동도 않는 초록색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흐르는 땀을 내버려 두고 책장을 넘긴다.
각주가 많아 흐름이 깨지는 책을 읽을 때면 왜인지 그 식탁의 엄마가 생각난다. 나는 이제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다.
윗집엔 나에게 잘 대해주었던 언니의 친구가 살고 옆 집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던 사랑스러운 남동생이 살았던 꽤 미화된 기억을 떠올려봐도 역시나 불을 질러 모조리 태워버리고 싶은 공간이다.
많은 추억이 쌓여 있지만 버려지고 잊혀진 부모님의 나날을 생각해 보면 속이 상해 길게 머무르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