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도 Sep 25. 2021

그것과의 만남

잊고 싶어도잊히지않는 기억

절에서는 흐르는 듯이 만들어지는 인연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무엇이든 노력과 수고, 경우에 따라 억지스러운 무엇인가 개입되어야 만들어지는 도시의 만남과 달리 절에서는 편안하고 따뜻한 인연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어찌 아름답기만 할 수 있을까. 개중에는 정말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만남도 있었다. 바로 ‘그것’과의 만남이다.  

    

아침에 어렴풋한 새소리에 잠이 깨고, 비 오는 날이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차려나갈 때면 내가 정말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난생처음으로 이 산에서 두더지도 보고, 반딧불이도, 부엉이도, 노루도, 멧돼지도 보았다. 자연은 정말 신비롭고 아름답구나, 항상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에 점차 스크래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독 습했던 여름, 지네에 물렸다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뱀만 한 지네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지네라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정말 무서운 존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람을 무는 뱀 같은 벌레라니. 심지어 그 감촉은 차갑기까지 하다고 했다. 언제라도 나타날 것만 같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유독 내 눈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심의 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초가을 새벽. 그 전날 유독 피곤해서 씻지도 못한 채 7부 정도 되는 근무복을 입고 잠에 들었었다. 이불도 잘 덮지 않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자고 있던 그때, 어깻죽지에서 묘하게 기분 나쁜 차가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다음부터 일어난 일들은 너무 순식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꽤 큰 무언가가 옷과 내 피부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몸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무지의 공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매를 다 지나온 그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손 한 뼘 길이는 될 법한 왕지네였다! 애완충(?)이라도 되는냥 어깨에서 곤히 자고 있던걸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트렸으니, 놀란 지네가 큰 웨이브를 그리며 순식간에 바닥과 벽을 타고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잡지도 못하고, 내방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내 평화롭던 절 생활은 끝이 났다. 한번 보이기 시작하니 절 곳곳에 있는 지네들이 다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도 샤워실에도, 차방에도, 책방에도 지네가 없는 곳이 없었다. 어떤 지네는 그 크기가 거의 작은 실뱀만 해서 다리 하나하나가 맨눈으로 다 보일 정도였고, 너무 작고 얇아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드는 새끼 지네 무리들도 있었다.      


여기서 더 큰 문제, 불살생의 종교 불교, 그 품에서 살고 있는 나는 지네를 잡아 죽일 수 없었고, 생포하여 자연 속에 돌려보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네를 잡아 죽일 용기도 없는 나에게 생포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지네가 워낙 많이 나오는 숲이기에 곳곳에 지네 생포용 차 통이 어디에나 준비되어 있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네의 진행방향에 빈 차통을 대고 있다가 지네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재빠르게 뚜껑을 닫고, 가볍게 흔든다. 흔드는 것은 지네를 기절시키기 위함인데, 산속으로 다시 뚜껑을 열어 풀어줄 때, 기절한 상태가 아니라면 손을 타고 올라와 물거나 하는 엄청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할 수 었다. 그게 나의 결론이었다. 여러 스님들이 지네는 아무것도 아니며 같이 살아가면 된다. 잡아서 풀어주면 된다. 말씀해주셨지만. 반발심은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지네 약을 사자. 다 죽이자 라는 마음뿐이었는데, 무지몽매한 중생을 구제해주시려는 스님들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다 찾은 해결책, 모기장이었다. 지네가 등장한 그다음 날부터 나는 방 안에서 작은 바람만 스쳐도 문밖으로 튀어 나갈 정도로 초긴장상태였다. 내 평화를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한 평 반만 한 내 방에 다시 위아래 양옆이 다 막힌 반평짜리 모기장을 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책을 읽고 잠을 잤다.     


가끔 남보기 부끄럽고 생활하기 불편하기는 했지만 모기장을 들어 청소를 하다 보면 가끔씩 말라죽은 지네 시체가 두세 개쯤 발견되고는 하기 때문에 전혀 후회는 없다. 이것이 내 나름의 지네와의 공생 방식이라고 봐줬으면 한다. 앞으로도 모기장 생활은 계속되리라.

이전 05화 아침을 깨우는 소리, 도량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