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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도 Oct 24. 2021

풍요로운 채식 생활

위기감을 느껴 시내에 나가는 길에 다이소에 들려 체중계를 샀다. 분명하다. 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방심했다.      


아침은 6시 반, 점심은 11시 반, 저녁은 5시 반. 딱 정해진 때가 아니면 밥을 먹을 수 없다. 정식으로 발우공양을 한 것은 아니지만, 먹을 만큼만 동그란 접시에 담아 깨끗이 비워냈다. 방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간식거리를 방에 가져다 둘 수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간헐적 단식을 반강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찌고 있는 이유는 샂가지였다. 너무도 대단한 공양간 보살님들의 솜씨.     


야채를 푹 끓여서 만들어낸 채수에 버섯을 듬뿍 넣은 카레는 밥 두 공기도 해치우기 충분했다. 방아잎과 꽃을 튀겨 낸 것을 맑은 간장에 찍어 먹으면 개수를 새기 민망할 정도로 많이 들어간다. 날이 추워지면 잣가루를 풀어 뽀얗게 올라온 국물에 떡국떡을 넣어 자른 김을 듬뿍 넣어 먹는다. 매운 것이 당기는 날에 슬쩍 공양간 보살님들께 귀띔을 하면 빨갛게 무친 더덕이 나오기도 하고, 제사를 하고 남은 절편을 길게 썰어 고추장에 볶은 떡볶이도 나온다. 특식으로 버섯탕수가 나오는 날이면 공양간에 도착하기 전부터 코와 배가 먼저 알아차린다. 그리고 때때마다 동지에는 새알 빚어 팥죽을 끓여먹고, 추석에는 송편을 한 잔뜩 만들어 먹는다. 이 모든 걸 공양간 보살님 두 분이서 뚝딱 해내신다.     


이 전에 학교를 다니며 절에 다닐 때에 주변 지인들이 절 다녀오면 살 빠지겠네, 고기 먹고 싶어서 어떻게 참냐 하는 걱정과 놀림이 뒤섞인 말들을 해주고는 했는데. 난 한 번도 절에 오면서 먹을 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찌들고 찌든 내 혀를 다시 살아나게 해 줄 생각에 신이 났을 뿐이다. 정해진 시간에 삼시세끼 매일 다른 메뉴가 나오는 채식 레스토랑이 도시에 있다면 적어도 한 끼에 만원 이상은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매우 속물적인 계산이고 의미도 없는 비교일 테지만 말이다.      


살이 좀... 찐 것과는 별개로 점점 건강해지고 있는 것이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손발이 차고 퉁퉁 붓는 성질이었던 것이 점차 나아졌고, 자극적인 것에만 길들여져 있던 내 미뢰도 야채 하나하나의 맛을 구분하고, 진정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식성도 변해 전에는 손도 대지 않던 두부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컵라면은 기회가 생겨도 잘 먹지 않게 되었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한 톨의 밥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다는 공양 개송의 의미도 점차 진하게 우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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