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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Feb 09. 2023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의 구간

정체다. 어느 날은 카페라테가 마시고 싶어 한 모금 들이키면 밍밍해서 아메리카노가 떠오르고, 어떤 날은 호기롭게 아메리카노를 선택했지만 딱 한 모금에 바로 라테의 부드러움이 떠오른다.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정체 구간이다. 이 구간을 넘어가야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세련된 멋진이가 된다는데, 나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정체다. 새해를 맞이한 1월의 호기로움은 사라지고 아직은 날카로운 추위에 웅크려 있는,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한 계절, 애매한 달 2월. 패딩을 입기엔 버겁고 코트를 입기엔 시린 날씨. 학생들에게는 졸업과 다가올 새 학기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끝과 시작의 달. 유난스레 짧은 날짜와 겨울과 봄 사이의 끼여 겨울보다 더 시린 달. 두 개의 계절이 공존하는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의 구간인 2월.     


언제부턴가 애매하고 갈팡질팡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의 구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여전히 라테의 부드러움도 아메리카노의 고소한 맛도 놓칠 수 없어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잦아졌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던데 망설이다 애써 선택한 결과들은 겨울의 끝 무렵의 힘이 빠진 찬바람처럼, 아직 어설픈 봄의 온도같이, 이도 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상황에 놓여 늘 후회와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취향의 차이도 있겠지만,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선배나 직상 상사들이 ‘찐 어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원래 쓰디쓴데, 아메리카노 정도면 아주 달콤한 거란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직장 생활의 고난과 역경, 시련을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퉁치는 저 담대함을 닮기엔 나는 아직 역부족인 것일까. 문제는 또 있었다. 아메리카노에 아직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슬프지만, 나의 영혼의 한잔이었던, 라테의 맛을 잃어버린 상실감도 꽤 컸다. 우울해도 스트레스가 쌓여서 허덕일 때도 이 한잔으로 겨우 치유하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 라테를 마셔도 무언가, 이 부족한 느낌은 어디서부터 채워야 할지 막막해져 버린다.      


2월의 영어표기인 February는 ‘페브리스(Febris)’라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열병의 신의 이름에서 파생했다. 페브리스는 로마 신화 속에서 각종 병을 관장하고 치유하던 ‘열병의 신’이다. 고대 로마사람들은 2월에 자주 열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2월에 페브리스를 극진히 모시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관리하는 정화 의식과 축제를 시행했을 정도로 2월을 중요시 생각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2월은 애매하고 어정쩡한 정체의 달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특별한 정화의 달이었던 셈이다. 열병을 예방하기 위한 정체가 아닌, 정화를 위해 한 템포 쉬어가는, 축제를 여는 달. 로마인들이 열병을 이겨내기 위한 의식처럼, 어느 한 단계를 지나가려면 이겨내려면 쉼표 하나 정도 필요하다고. 정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밍밍해진 라테와 아직은 쓰디쓴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지금 내가 카페라테에서 아메리카노로 넘어가는 중인지, 카페라테로 취향이 굳어질지, 아니면 아예 다른 메뉴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직 차가움의 밀도가 높지만, 어느새 봄의 형태를 갖춘 따뜻한 바람이 불 것이다. 얇아진 옷 소매 사이로 찬기부터 흘러들어오겠지만 꽃망울이 어느새 가지 끝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봄이 이제 다 왔구나 싶어 긴장을 풀 때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봄이 올 것이다. 길었던 정체기가 끝나가고 있다.      




이 글은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3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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