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스치는 아침 공기가 알싸하다. 어쩐지 공기의 농도와 깊이가 다르다. 매해 당연하게도 가을을 맞이하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나는 자주 마음을 앓았다. 이 찬바람에는 묘한 능력이라도 있는지, 어느새 스민 바람에 온갖 마음의 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이상한 마음이 되어버린다. 그저 트렌치코트를 옷장에서 꺼냈을 뿐인데도, 발끝에 낙엽이 채일때마다 마음을 울렁이게 만든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곁에 서서 오래도록 숨을 들이마신다. 이제 찻물을 올릴 차례. 이런 마음을 다스릴 때는 따뜻한 홍차가 딱이다.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며 자주 쓰는 머그잔에 홍차 티백을 담아둔다. 물이 펄펄 끓어오르면(아주 펄펄 끓는 물이어야 한다), 컵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어준다. 컵 안 가득, 금세 붉은 빛깔이 차오르면서 쌉쌀한 향이 피어오른다. 꼭 단풍잎 색처럼. 마치 펄펄 끓어오른 여름을 온전히 지나고 우러나온 고요한 가을의 빛깔처럼.
홍차를 너무 짧은 시간 우려내면 온전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영국에서는 이 홍차를 우려내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룰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딱 3분 정도, 적당히 우려낸다. 덜 우려내면 밍밍하고 향이 깊지 못하고, 너무 우려내면 금세 특유의 씁쓸한 맛이 향을 넘어서 버린다. 3분이 지난 뒤 티백을 건져내고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간다. 뜨거움 뒤에 넘어오는 홍차의 깊은 향과 쌉쌀하면서도 달큰한 오묘한 맛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막 우려낸 가을의 맛. 뜨겁고 거친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의 향취를 홍차 한 잔으로 가늠해본다. 점점 더 오래 우릴수록 붉어지는 가을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홍차를 마시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계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름은 싱그러운 제 몸 하나 달구어 온전히 계절을 만들지만, 가을은 천천히 찬바람을 스며 만든 계절인 것처럼. 홍차는 찻잎을 가열하거나, 산화시키는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차가 된다. 여름을 닮은 녹차는 잎을 따자마자 찌거나 가열하면 녹차가 되고, 이 녹차 잎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면 말차가 된다. 태양을 견뎌내고 바람이 천천히 스미도록 잎을 산화시키면 향도 빛깔도 가을을 닮은 ‘홍차’가 된다.
홍차는 카멜리아 시넨시스(동백나무과)에서 돋아난 반짝이는 잎으로 만든다. 산화 정도에 따라, 수확시기에 따라, 발효를 거치느냐에 따라 녹차, 홍차, 황차, 백차, 청차(우롱차), 흑차 6종류로 구분한다. 모두 같은 나무에서 수확한 잎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공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지닌 다양한 차가 된다. 또 생산지를 기준으로 이름을 붙이는데, 흔히 들어본 아삼, 다즐링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홍차를 생산지의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생산지에 따라 홍차의 맛과 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후와 토양, 강수량, 바람, 일조량 등이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같은 생산지에서조차 매해 맛과 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기후변화로 원두 재배가 힘들어져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다고 했을 때, ‘그럼 이제 홍차를 마셔야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맛과 향이 기후에 영향을 받는 홍차도 기후변화로 인해 생산량이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차 생산량 감소는 물론, 품질에도 타격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는 이제 막 홍차에 눈을 뜬 나에게는 가혹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잔에 아직 남아 있던 홍차를 들이켜본다. 마음의 울렁거림을 잡고자 시작한 일이, 홍차를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울렁거림은 줄어들었지만, 가을은 깊어 간다. 홍차를 닮은 저마다의 농도로 깊어 가는 가을을 오래오래 천천히 음미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