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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Apr 21. 2023

봄과 완벽한 팬케이크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팬케이크 같은 날씨다. 따뜻한 햇살이 시럽처럼 쏟아지고, 폭신한 구름은 보드랍게 떠 있고, 여기저기 달큰한 봄 내음이 발끝을 간지럽게 만든다.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 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과 함께, 뭉근한 다짐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이번 주말에는 꼭 벚꽃을 보러 가야지.’ 

‘꽃그늘 아래에서 한참 놀다 와야지.’


 다들 짧은 봄의 찰나를 놓치고 싶지 않아 소리 없이 마음이 분주하다. 다들 동그랗고 따뜻한 팬케이크 같은 얼굴을 한 봄이다.      


부드러운 팬케이크 가루를 그릇에 쏟고 적당히 우유를 부은 뒤 달걀을 넣어 거품기로 마구 풀어준다. 가루와 액체가 충돌하며 서로를 받아들이기까지 거품기의 역할은 필수다. 열심히 저어 준 뒤 이윽고 온전히 하나가 된 반죽을 미리 약하게 달궈둔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부어준다. 뭉근하게 천천히 팬케이크가 익어가는 동안 나른한 봄도 함께 익어간다. 쉽고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팬케이크도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팬케이크를 구울 때 가장 조심할 점은 낮은 온도에서 조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한 불에서 익히면 금방 겉면만 타버리고 속은 익지 않는다. 약불에서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반죽 위로 기포가 어느 정도 올라왔다면 뒤집어도 좋을 타이밍. 아랫부분이 잘 익었는지 살짝 들춰본 후 노르스름한 색깔이 보이면 조심스레 뒤집어 익힌다.      


지금이야 얼추 그럴듯한 팬케이크를 만들어내지만, 내가 처음 만든 팬케이크는 상당히 처참했다. 겉은 까맣게 탔고 속은 익지 않은 반죽이 뒤엉켜 ‘엉망’이라는 단어에 형태가 있다면 딱 이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맛있는 팬케이크를 만들 생각에 들떠 조급했고 온도를 조절할 줄 몰랐으며, 적당히 뒤집어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실패를 위한 완벽한 삼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흔하고 쉬워 보이는 것을 준비 없이 만만하게 본 대가였다.      


흔하고 쉽게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벚꽃을 몇 해나 놓쳤다. 첫해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기 너무 무서워 벚꽃을 놓쳤고, 그다음 해에는 아이가 아파서 벚꽃이 지는지도 모르고 봄이 지나갔다. 그리고 꼭 봐야지 벼르고 있던 작년에는 예상치 못한 긴 암흑기가 펼쳐졌다. 진작에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몇 해나 벚꽃 하나조차 보기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눅눅한 시리얼 같은 시간이었다.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놓고도 바로 먹지 못했고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들에 파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면 식탁 귀퉁이에 깜빡한 시리얼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눅눅해서 차마 먹을 수도, 먹을 시간도 없던 날들이었다.      


접시에 옮겨 담을 수도 없어서 프라이팬에서 어쩔 줄 모르고 남겨진 참담한 팬케이크를 보며 아이는 깔깔깔 웃었다. 팬케이크를 먹을 수 없다는 상실감보다 엉망이 된 팬케이크가 그저 재밌는 아이의 천진함에 덩달아 나도 깔깔깔 웃었다. 그때 불현듯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눅눅한 시리얼이 떠올랐다. 눅눅한 시리얼이 슬펐던 건 눅눅해질 때까지 방치된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었다. 엉망이 된 팬케이크도 ‘실패’가 아닌 ‘웃음’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은 아이에게 배운다. 그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에 나는 엉망이 된 팬케이크처럼 눅눅한 시리얼도 이젠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다시금 팬케이크를 굽는다. 이번엔 성공일지 아닐지 지켜보는 아이의 눈이 사뭇 진지하다. 벚꽃이 금세 떨어지고, 봄이 금방 떠나버려도 조급해하지 말자. 성급하게 뒤집는다면 덜 익은 팬케이크 같은 봄을, 너무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눅눅해진 시리얼 같은 봄을 만날지 모른다. 천천히 느긋하게 잘 구워진 달큰한 봄을 음미할 것. 자 이제 뒤집을 차례다.      





이 글은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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