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아라 Aug 09. 2022

‘스콜쳐(Scorcher)’

물크러지는 여름

‘제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입맛을 돋우는 딱 알맞게 익은 과일들, 풍미가 한껏 살아나는 제철 음식들. 그리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온전한 계절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순간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들고, 겨울이면 눈이 아름답게 내리는 순간들을 보고 있자면 한낱 고민거리들이 소용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여름의 제철은 '폭염'이다. 뜨거운 열기가 모든 것을 익혀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들면서 너무 익어버린 자두처럼 물러지고 쉽게 당도를 잃는다. 잠깐 걷기만 해도 흐르는 땀방울과 물먹은 솜이 되어버리는 몸. 머릿속까지 찐득해지는 여름의 제철은 늘 예외였다.

 

스콜쳐(Scorcher)’라는 단어가 있다. 불에 그을린다는 ‘scorch’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모든 걸 태워버릴 듯이 더운 날이라는 뜻한다. 우리나라의 말로 옮겨오자면 ‘폭염’, 기상청의 용어로는 ‘폭염 경보’ 정도는 되어야 경쾌하게 맞아떨어질 것이다.

 

나는 이 스콜처를 임신 기간 동안 경험했다. 임신 중의 여름은 온전히 스콜처 그 자체였다. 불구덩이 속에서 무거운 몸을 끌고 다니는 느낌, 비 오듯 쏟아지던 땀과 더위를 먹은 듯 늘 어지럽고 잠들 수 없던 여름의 한복판.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웠던 여름을 보내야 했다.

 

얼마 전 임산부들을 상대로 밸런스 게임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중 한 질문이 <한 겨울 출산 vs 한 여름 출산>이었다. 이 게임에 참여한 81% 임산부들이 겨울 출산을 선택하면서 '여름 출산'이 더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산후풍을 예방하기 위해 폭염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까지 조심해야 하며, 한여름에도 긴 소매옷과, 긴 바지를 입고 몸을 보호해야 한다. 잇몸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차가운 음료도 당연히 마실 수 없다. 또한, 임신 기간 동안 체내에 비축해둔 수분이 출산 후에는 한꺼번에 빠져나가기 때문에 땀이 2배나 많이 흐른다. 더위와의 사투에 져버린 산모가 찬 바람을 가득 쐬어버린다면 몇 달 뒤 뼈가 시리고 아픈 산후풍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구 결과도 한몫한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진행한 유산 위험의 계절적 차이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월에 비해 8월에 유산 위험이 유의미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화여자대학교 의학과 하은희 교수 연구팀은 임산부 130만 명을 대상으로 6년간 폭염 노출 시간과 미세먼지 노출의 영향을 분석한 결과, 임신 중기(13주~26주)에 62시간 이상 폭염에 노출된 임산부는 전혀 노출되지 않은 임산부와 비교할 때 조산 가능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 잔인한 여름이 묘하게 임산부와 맞닿아 있는 것은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쏟아지는 강한 햇빛을 견뎌내며, 꽃나무들이 안팎으로 무성하게 뻗어 나간다. 이미 만삭인 푸르름을 보듯이 여름은 1년 중 가장 많은 꽃을 피우는 계절이라고 한다.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여름을 견뎌냈나 보다.

 

앞서 언급했던 단어 ‘스콜쳐’에는 또 다른 뜻이 하나 숨겨져 있다. 스포츠에서 사용된다면 ‘기가 막힌 슛!’을 뜻한다. 어물쩡 넣는 골이 아닌, 정확하고 짜릿하게 승리를 향한 강렬한 슛. 이런 슛은 언제나 모든 걸 태워버릴 듯한 열정의 뒤에서 발현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여름의 제철은 뜨거움을 이겨낸 뒤 피어나는 꽃한송이 같다. 역시 여름도 제철이다.



이 글은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전 02화 이토록 낯선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