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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멜론 반 통에 책 몇 권

문손잡이에 걸린 요시코 상의 사랑

by 포공영 Mar 03. 2025

자전거를 세워두고 집 문 앞에 서니, 문손잡이에 걸려있는 흰 비닐봉지가 보였다. 뭔가 묵직한 것이라도 들었는지, 팽팽하게 매달려 있었다. 뭐지? 하고 봉지를 들어 올리는데 과연 무거웠다. 집 안으로 들어가 꺼내어 보니, 큼직 막한 멜론 반 통에, 영어권에서 팔 것 같은 작은 물건 몇 개였다. 누가?라는 의문은 문자를 확인하면서 곧바로 풀렸다. 


“선물 받은 멜론인데 너도 맛 좀 보라고 놓고 간다. 나머지 물건은 호주에 살고 있는 친척이 보내준 건데 필요할 때 쓰면 좋겠고.” 


문자를 보낸 이는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교회의 어른이었다. 복선(福善) 권사님 또는 요시코(善子)상이라 불리는 분이 걸어 놓고 간 것이다. 권사님 남편이 중고책방을 운영하는데, 그의 부탁으로 한국어책의 제목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 적이 있어, 내 집을 알고 있었다. 그 후 두어 번 정도 더 문손잡이에 뭔가를 걸어 놓고 갔다. 코로나로 문밖출입이 어려울 때, 집에만 있어 심심할 테니 책이라도 읽으라면서 몇 권을 걸어 놓고 가기도 했다. 집안에 내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초인종을 눌러 불러내지 않고, 인기척 없이 조용히 떠났다. 대신 전화를 걸어 알렸다. 보통은 문자로 연락하는데 그날은 책 사이에 용돈도 넣었기에 서둘러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재일교포 2세는 한국어를 거의 못 한다. 차별이 심할 때라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살 수 없는 세대였기에 모국어가 일본어였고, 이름도 2개씩 가지고 있었다. 한류붐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젊은 교포 3, 4세까지 대부분은 한국식 이름과 일본식 이름으로 나눠 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한국 이름과 통명(通名, つうめい)이라 불리는 일본 이름으로 구분한다. 부모 세대는 ‘복선’이라고 불렀고, 그 외 사람은 ‘요시코’라고 불러왔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요시코 상이라 불러 본 적이 없는 복선 권사님은 엄마와 동갑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그의 첫째 아들은 나와 같은 나이였고 한국어가 유창했다. ‘복선’이라는 이름처럼 좋은 사람으로 주변 사람을, 특히 한국에서 온 유학생을 살뜰히 돌봐주기로 유명했다. 그 돌봄 대상 가운데 한 명이 혼자 사는 나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사는 곳을 모를 때는 집을 물어보는 대신 근처로 불러내어, 습하고 더운 오사카의 여름 날씨에 적응은 되었는지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요리를 못하니 대신 몸보신 좀 하라며 삼계탕 값을 건네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름에 삼계탕을 먹지 않느냐고 하면서, 한사코 거절해도 주고 갔다. 해서 나는 답례로 채소를 좋아하는 권사님을 위해 월남쌈 도시락을 만들어 전했다. 


16살, 고등학생 때부터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해서 엄마와의 추억이 많지 않다. 한국에서 쭉 살았다면 엄마와 했었을 법한 등산이나 공원 산책, 카페 나들이 등과 같은 일을 복선 권사님과 함께했다. 한번은 신칸센을 타고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다테야마산(立山)으로 1박 2일 여행을 간 적도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보다 권사님과 시간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 기억마저 있다. 


한 번도 복선 권사님에게 엄마 같다는 말을 내뱉은 적은 없지만, 내 일본살이에서 권사님의 지분은 엄마만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귀국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3, 4개월에 한 번씩은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물어오곤 한다. 귀국한 첫 해에는 당장 취직이 어려울 테니 보태쓰라고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돈을 짧은 편지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적은 금액이지만 마음을 보낸다면서. 문손잡이에 걸려있던 그 사랑은 오늘도 내 마음을 두드린다. 


“お元気?(오, 겡끼?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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