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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Feb 01. 2021

스웨덴의 밤은 위험하지 않다?

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Ⅳ

스톡홀름만큼은 아니지만 예테보리에도 관광지라 할 만한 볼거리들이 있다. 그중 예테보리에서 가장 오래된, 예테보리와 모든 역사를 함께한 건물이 있다 하여 찾아 나섰다. ‘왕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크론후세트(Kronhuset)’라는 이름의 건물로 네덜란드 양식의 주거용 건물인데, 본관에는 목관 오케스트라 공연장, 본관 주변에는 골동품점, 갤러리, 초콜릿 전문점, 시계방, 액세서리점, 카페가 있었다. 보고, 먹고, 쇼핑하는 재미를 한곳에서 모두 누릴 수 있어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인사동 쌈지길과 같은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이처럼 즐길 거리는 다양하지만 난 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만 노렸다. 카페 크론후세트(Café Kronhuset)에서 글뢰그(Glögg) 한잔 마시기. 글뢰그는 뱅쇼와 같은 ‘따듯한 와인’을 말하는데,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에서는 글뢰그라고 부른단다. 스웨덴식 뱅쇼인 것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시즌 한정으로 카페 크론후세트에서 맛볼 수 있다 하니, 때마침 크리스마스도 며칠 앞두고 있겠다 알코올 성애자로서 꼭 마셔보고 싶었다. 글뢰그에서 스웨덴 한 잔! 캬~~~

크론후세트(Kronhuset), 왕관의 형상이 보이시나요?

크론후세트 근처에 도착했다. 구글맵을 보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크론후세트가 있었는데 엎어질 수가 없었다. 입구가 철창으로 막혀있었기 때문, 이미 영업이 끝난 것이었다.


;;; 뭐 이렇게 빨리 닫냐;;; 아직 8시도 안됐는데.”


오후 4시면 어둠이 깔리는 12월 스웨덴의 저녁 7시는 우리나라 밤 10시와 비슷하다. 한국은 이제 막 시작할 시간이지만 스웨덴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분위기. 거리에 인적도 부쩍 줄어들고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는다. 버스나 트램도 텅텅 비어있다. 일반 직장인들의 퇴근이 빠른 만큼 상점들도 일찍 문을 닫는다는 걸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닫을 줄은 몰랐다. 이래 봬도 나름 핫플이자 관광지인데 저녁 9시 정도까지는 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일 뿐. 굳게 닫힌 철창 사이로 크론후세트를 빼꼼히 바라보다 크리스마스 전에 꼭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이만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창 밖에서 바라본 크론후세트

거리는 한층 더 고요해져 있었다. 아니, 고요하다 못해 살짝 음산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스웨덴 치안은 복지만큼이나 믿을 만한 수준이라 했으니 안심하고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글뢰그를 못 마신 대신 맥주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속보로 걷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멀리서 봐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남자 역시 멀리서부터 나를 응시하며, 분명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뭐지 저 남자는?’

행색도 심상치 않았다. 장발의 금발머리, 여기저기 뾰족한 원뿔 모양의 찡이 달린 가죽 재킷에 타이트한 가죽바지를 봐서는 무슨 로커 같았다. 그것도 하드코어 한 헤비메탈 로커. 한 손에는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나를 계속 주시하며 다가왔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아C, 큰길 놔두고 왜 하필 이 좁은 골목길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후다닥 지나가야지 싶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급하게 어디 가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그와 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제발 그냥 가라! 나 외국인이라 돈도 몇 푼 없고 다른 거 줄 것도 없는데... 설마, 때리거나 죽이지는 않겠지? 그냥 선빵 날릴까?’

거리가 좁혀질수록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내 발만 보여야 할 내 시선 안으로 두 개의 발이 성큼 들어왔기 때문. 순간 무시하고 갈까 생각했지만 얼음이 돼버린 나머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이 오돌토돌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두렵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약 빤 것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 망했다...’     

이제 다 틀렸다. 잔뜩 겁을 먹은 내 속내를 다 들켜 버렸으니 강한 척 뻥카를 칠 수도 없게 됐다. 먼저 뒷걸음질 친 게 행여나 심기를 더 건드리지나 않았기를 바랄 뿐. 그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오! 미안해요! 무서워하지 마세요!"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남자의 실제 대사 : Oh! Sorry! Don’t be afraid!)

‘응? 뭐지?’

“혹시 여기 어딘지 알아요?”


담배를 쥔 손가락으로 자신의 핸드폰에 켜져 있는 지도 앱의 한곳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예상 밖의 전개에 경계심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런데 두 가지 의문이 여전히 안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 지도 앱을 보고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둘, 겉모습은 딱 스웨디쉬(Swedish)인데, 예테보리 사람이 아닌가?


일단 말투가 또박또박한 것으로 보아 약을 한 것도, 술 취한 취객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다가가 가리키는 핸드폰 화면을 봤다. 당연히 내가 봐도 가리키는 목적지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 위치를 기반으로 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구글이가 친절하게 길 안내를 시작했다. 한데 남자는 지도가 익숙하지 않아 보는 게 어렵다며 미안하지만 혹시 멀지 않다면 같이 가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난 다시 느슨해졌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뭐지? 기계치인가? 아무리 그래도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남자가 가고자 하는 곳은 엄연히 호텔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큰 길가에 있어 설령 나쁜 마음을 먹더라도 대놓고 어쩌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었다. 여러 가지로 꺼림직 한마음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아주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불친절한 외국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난 큰길로까지만 함께 가주기로 했다. 큰길로 나가면 멀리서 얼추 보일 테니.


“땡큐 쏘 머치!^^”

‘뭐지? 저 눈웃음의 의미는?’     

여전히 경계태세를 유지한 채, 그렇게 세상 어색하고 오싹한 동행을 시작하려는데


“잠시만요.”


남자는 같은 방향으로 지나가는 다른 행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번엔 누가 봐도 스웨디시라 할 만큼 전형적인 스웨덴 사람이었다. 아마 길을 물어보는 것이리라. 대화를 마친 후 다시 내게 왔다.


“정말 고마웠어요! 아깐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저 분과 함께 가면 될 것 같아요.^^”

... 정말 잘 됐네요조심히 가세요~ Bye~(잘 가요빨리 가요제발...)

상황 종료. 정말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렇게나 추운 날씨를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긴장을 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해피엔딩으로 끝나 다행이었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듣던 대로 스웨덴의 밤은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에는 이른 저녁시간부터 늦은 밤이나 새벽 분위기가 풍기니 인적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치안이 잘되어 있고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높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싶다. 다음부터는 늦은 밤 산책을 나가거든 호신용으로 쓸 물건 하나 정도는 챙기련다. 그나저나, 여전히 그 남자의 정체는 의문이다. 스웨덴 사람인지 아닌지, 목적지까지는 잘 찾아갔는지, 함께 가준 스웨덴 사람은 무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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