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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Jan 31. 2021

한국사람 망신은 내가 다 시켰네

내 생애 첫 유럽 - Episode Ⅲ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따듯한 음료 한 잔이 당겼다. 하지만 호텔방 안에 있는 거라곤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물이 전부. 호텔 카페테리아에 가면 24시간 즐길 수 있는 핸드드립 커피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호텔 복도마저 추워 방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문득 한국에서 가져온 비장의 아이템이 생각났다. 바로 커피 믹스! 혹시나 해서 비상용으로 몇 개 챙겨 온 건데 요렇게 요긴하게 써먹게 될 줄이야. 모처럼 나에게 칭찬을 해줬다. 토닥토닥!

커피를 꺼내려고 가방을 뒤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아이템 하나를 더 발견했다. 앗싸! 소리 벗고 팬티 질러!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커피 스틱 옆에 딱 붙어 있는 네모난 그것의 정체는 믹스 커피와 환상의 케미를 자랑하는 정사각형 모양의 비스킷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신의 한 수! 믹스 커피와 찰떡궁합으로 소문난 조합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그리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만에(한 열흘?^^;;) 한국의 맛을 느낄 생각에 신이 났다.


콸콸콸콸~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커피포트에 붓고 물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커피 한 잔의 여유에 풍미를 더해줄 비스킷을 덜어 접시에 정갈하게 세팅했다. 그러고는 이 밤을 함께 할 영화를 골랐다.  

‘물이 너무 많았나? 빨리 안 끓네.’

커피와 비스킷을 얼른 먹고 싶은 마음에 한동안 숨겨두고 다녔던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근성이 튀어나왔다. 다시 영화 고르기에 집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선택장애를 극복하고 간신히 영화를 골랐다. 재생 버튼만 누르면 바로 볼 수 있게 세팅까지 완료. 이제 커피만 오면 모든 것이 완벽한 스웨덴의 밤 완성이다. 때마침 하얀 김이 모락모락 방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뽀얀 수증기로 가득 찬 방은 한결 온기가 더해졌고 가습기를 틀어놓은 것 마냥 촉촉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 불길한 예감의 시작은 얼굴 정중앙에 있는 두 개의 구멍에서부터였다. 킁킁거리며 정체불명의 향기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펄펄 끓고 있는 커피포트가 보였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커. 피. 포. 트. 끓고 있는 게 물이 아니라 커피포트였다!


“어우! 이거 뭐야!?? 안돼~~~에에에“


기겁을 하며 부리나케 주방으로 날아갔다.(정말 날다시피 뛰었다.) 커피포트의 바닥이 완전 녹아 뭉그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액체로 된 플라스틱들이 마치 액체 괴물처럼 뽀글뽀글 끓어올랐다. 피사의 사탑보다 더 심하게 한쪽으로 기우뚱 해진 커피포트는 곧 무너질 듯 위태위태했다.


“아... 어떡하지?”


얼른 전기레인지부터 끄고 커피포트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될 것을, 당황한 나머지 이 단순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정지화면이 된 사이 커피포트는 점점 형체를 잃어갔고 뽀얀 연기도 더 심해졌다. 급기야 검은 그을음까지 끓기 시작했다. 그제야 뒤통수 한 대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 전기레인지를 끄고 커피포트를 싱크대로 옮겼다. 그러자 전기레인지에 눌러 붙어있었던  커피포트 밑바닥이 갓 만들어진 피자처럼 쭈우우우욱~ 늘어졌다.     

“으;;;;; 뭐야 이거 어떡하냐..ㅠㅜ”


양손에 한 움큼 물티슈를 뭉쳐 쥐고 전기레인지를 닦았다. 하지만 까맣게 새겨진 그을음과 이미 식어서 굳어버린 플라스틱 덩어리들은 닦이지 않았다.


“아... 망했네... 페널티 무는 거 아닌가 이거;;;"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페널티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따듯하지만 뿌연 방공기가 나가고 얼음 같지만 맑은 북유럽의 밤공기가 들어왔다. 춥다기보다는 상쾌했다. 후~~~ 흡, 하아~~~. 몸 안에 나쁜 공기를 빼내야 할 것 같아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깊게 숨쉬기 운동을 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링~

“네~”

“리셉션인데요.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화재 감지가 떠서요.”

“아... 네, 맞아요... 제 실수예요.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ㅠㅜ”


연기 때문에 화재 감지기가 동작한 듯했다. 난 사건의 전말을 모두 실토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평소 되지도 않던 영어가 술~술~ 또박또박 잘도 나왔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괜찮은 거죠?”

“네! 정리 다 끝났고, 지금 환기 시키고 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ㅠㅜ”

“괜찮아요! 일단 저희 직원이 확인차 올라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직원이 찾아왔다. 먼저 전기레인지을 살폈다. 잘 동작했고 그을음과 녹아서 굳은 플라스틱 덩어리들은 청소할 때 닦으면 돼서 문제없다고 했다. 전기레인지 오케이! 문제는 커피포트였다. 커피포트를 집어 든 직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밑바닥이 녹아내려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빼박 물어주어야겠구나 싶었다. 커피포트 안 오케이.ㅠㅜ


“끝났습니다. 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커피포트는 제가 배상해야 하겠죠? 얼마 정도 될까요?”

“아니에요~ 저희는 당신의 안전이 제일 중요해요. 아무 일 없었으니 괜찮아요.^^ 이건 새 걸로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확인을 마친 직원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한 손에는 폐허가 된 커피포트를 쥔 채 방을 나갔다. 직원이 떠난 후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환호성이 밀려왔다. 워낙 물가가 비싼 북유럽이다 보니 페널티가 심히 걱정됐었는데. 정말 미안하기는 하지만 페널티는 없어 참 다행이었다. 얼추 원만하게 해결이 된 것 같아 소파에 앉아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난  대체 왜 커피포트를 전기레인지 위에 놓은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창피했다.


‘아C, 쪽팔려!ㅠㅜㅠㅜ‘


캐리어에 있는 짐을 다 빼버리고 내가 들어가 그대로 한국행 비행기 수화물로 실리고 싶었다. 이 정도면 최소 한 달은 넘게 매일 밤 이불킥 할 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무의식적인 행동과 습관. 집에서는 커피포트 쓰지 않아 평소 주전자로 물을 끓이는데, 물을 받고 습관적으로 전기레인지 위에 올린 것이다. 주전자로 착각하고 말이다.

문득 직원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짙은 친절한 미소 사이에 비웃는 것 같은 미소도 순간순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직원이 떠나기 전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내 의심에 불을 지폈다.


“앞으로는 전기레인지 위에 절대! 올리지 마세요!”


잠깐이라도 올려놓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커피포트 사용법을 모르는 줄 알고 하는 소린지 애매모호한 뉘앙스였다. 혹 후자라면 나 하나 무시당하는 건 괜찮은데 혹시나 한국 사람들은 커피포트도 쓸 줄 모른다고 오해할까봐, 한국사람 망신을 내가 다 시킨 건 아닐는지 마음에 걸렸다. 물론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아직도 이깟 일로 동양인을 오해하고 무시하고 그러겠냐마는, 마지막 미소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그 직원만 알뿐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커피는 카페테리아 가서 마시는 걸로.

일이 터지기 직전 사건의 현장
환기시키면서 바라본 노을지는 예테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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