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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24. 2024

방비엥행 4차원 미니밴

 분명 어딘가에 웜홀이 있을 거야

방비엥 가는 미니밴이 도착했다. 비록 1박이었지만 체크인하자마자 병따개가 없어 병맥주 좀 따달라는 부탁에 병으로 병을 따는 차력쇼를 시전 하고, 다음 날 체크아웃 후 짐도 보관해 주고, 방비엥 미니밴 예약까지 대신해 주며 (물론 호텔이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라오스에 대한 첫인상을 친철함으로 심어준 호텔 프런트 이하 직원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며 기사님을 따라갔다.

비엔티안 1박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원 비엔티안 호텔 One Vientiane Hotel

미니밴이 애초에 프라이빗밴이 아닌 건 알고 있어 우리 같은 여행자건, 로컬 피플이건 복작복작하게 가게 될 줄은 이미 예상했던 바. 하지만 트렁크로 추정되는 뒷공간에 이미 짐 놓을 틈조차 보이지 않아 약간 당황스러웠다. 짐이 많다는 건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배슨생의 캐리어가 먼저 실리고(캐리어가 승리자다 VV) 다음 차례로 나머지 네 명의 배낭들이 기사님의 손에 맡겨졌다. 과연... 기사님은 테트리스 끝판왕을 깰 수 있을 것인가?! 신기하게도 기사님이 배낭을 올려다 내렸다, 세웠다 눕혔다를 몇 번 하니 짐들이 정갈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이 어려운 걸 해낸 걸로 봐서 기사님은 아마도 테트리스 만렙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과 함께 차 안으로 탑승했다. 안쪽 4명 자리는 아내와 친구들에게 양보하고 난 2열 문쪽 보조석에 정착했다. 좋은 사람 증후군이 만들어낸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 대가로 얻어진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보조석을 비롯해 주변에도 짐이 한가득이라 보조석이 짐에 묻힐 지경. 다행히도 엉덩이 붙이고 앉을자리는 있었지만 정말로 엉덩이만 3분의 2 걸쳐서 한쪽 궁둥뼈에 의지한 채 앉아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무사히 탑승완료! 짐 개수로 보나 사람수로 보나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 듯했다. 이제 2시간 후면 방비엥이다. Let's go Vang Vieng!





한참 잘 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가 멈췄다. 기사님이 내려 차문을 열자 문 앞에 서있는 한 남자. 설마... 태우려고? 그랬다. 외모도 그렇고 짐도 단출한 게 현지인 같았다. 기사님이 자리에 올려진 짐들을 정리해 엉덩이 붙일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나마 짐이 많지 않아 천만다행. 남자는 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쪼그려 자리에 안착했다. 말이 자리지 거의 틈새에 끼어 앉은 모양새였다. 정말이지 이제야말로 정말 마지막 손님이겠구나 싶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방비엥으로 달려봅시다 기사님!




차가 막히는 걸까?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서행을 하는 게 쉽사리 비엔티안 도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이제 고소도로 타고 달릴 때가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창 밖을 보니 예상대로 여전히 비엔티안 도심인 듯 보이는 거리. 그리고 마침 그때 차가 또 멈췄다. 설마... 설마... 하는 사이 호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두 남녀. 딱 봐도 한국인 커플. 진짜 설마... 이 차 기다린 거니? 설마는 역시 불길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테트리스 끝판왕 일 줄 알았는데 뒤에 또 왕이 두 명이나 더 있을 줄이야;;; 끝판왕 깨면 나오는 히든 트랙 같은 건가? 그런데 운전기사님은 이걸 또 깨버렸다.(테트리스 초만렙 킹정) 어떻게 한 걸까...? 이제는 분명 공간은커녕 틈조차 없는데. 이 차 어딘가엔 도라에몽의 4차원 주머니처럼 웜홀이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짐은 해결됐고 이제 사람이 타야 하는데, 아! 기사님 옆 조수석과 가운데 보조석이 남아있었다. 와... 진짜 공간이란 공간은 활용해 알차게도 태우고 간다. 여백의 미라는 걸 모르는 건가? 이제 다시, 이번엔 진짜 진짜 방비엥으로 출발!!! 하는 거 맞겠지? 아무리 4차원 미니밴이라 해도 이제는 정말 사람도 짐도 더는 마련해 줄 공간이 없었다. 만약에 여기서 더 태울라는 낌새가 보인다면 체면이고 뭐고 진상 부리며 컴플레인 걸어야겠다며 내적 다짐을 하고는 본격적인 고속도로 주행모드로 들어갔다. 비엔티안에서 방비엥까지는 약 130km. (뭐 엄청난 장거리는 아니지만) 장거리 이동엔 역시 잠이 최고니까. 2시간 후쯤 눈을 뜨면 방비엥이겠지. 그런데 뻣뻣이 치켜든 고개와 양무릎이 서로 닿아 강제로 매너남이 되어버린 다리의 불편함이 온 신경을 타고 맴돌아 잠이 오지 않았다. 노곤한데 눈은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황.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얼른 방비엥에 도착해 이 4차원 미니밴에서 탈출하는 것뿐. 존버만이 답이었다. '그래, 바깥 구경이나 하면서 2시간 존나게 버텨보자!' 시간이 갈수록(방비엥과 가까워질수록) 내 정신은 점점 4차원으로 빠져들었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거 이제 그만 태우고 좀 갑시다 기사님!
안녕 비엔티안!
드디어 도심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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