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증거 [No.2 개고생, 말하지 않아도]
그랬다. 카이라와는 진짜 많이 만났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거의 매일 만났다. 지금 그 애는 12학년을 보내고 있다. 아마 내년 상반기에 수능을 보며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되겠지. 목표가 높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기에 인스타그램 연락이 조금 뜸해졌지만, 상관없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사회로 잘 나갔으면 좋겠다.
카이라와 비슷한 친구가 한 명 더 있다. 참... 튀르키예에 이런 청년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한 명 더가 아니라 만났던 모든 친구에게 아픔이 있다. 이번에 소개할 친구는 Eren 에렌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대학교에 재학 중인 친구다. 원래는 내 친구가 아니라 하우스메이트의 친구였는데, 하루 일과는 모두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가 놀러 온 그 친구를 만나면서 나와의 연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수업인 TÖMER 퇴메르가 대학마다 있기 때문에 Van 반에 있는 대학교에도 퇴메르가 있어서 그 대학에 여럿 방문한 적이 있다. 에렌은 나보고 대학에서 오다가다 마주쳤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이 없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 보기에도 동양인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을 본다면, 나도 이들을 볼 때에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튀르키예 민족과 쿠르드 민족은 민족 단위로 보면 확실하게 얼굴의 생김새가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볼 때엔 다소 구별하기 힘들다. 그리고 동안이라 불리는 한국인과 달리 나이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여튼 나도 한국에서 대학생이기에 공감대가 어느 정도 맞았다. 미래를 위한 고민, 불확실성 많은 것들이 대화 주제로 나왔다. 튀르키예도 똑같이 취업난이다. 특히 동남부 지역은 짜게 받는다. 우리나라는 최저시급이 있어 시간당으로 계산하지만, 튀르키예는 최저임금이 월급이다. 시간도 아니고, 며칠도 아니다. 튀르키예 노동부는 2024년 1월 1일부터 월 최저임금을 17,000 텔레로 전년도 대비 약 2배 인상했다. 이로 인해 튀르키예의 물가상승은 아마 당연했던 것 같다. 여튼, 월 1만7천 텔레라면 하루 600 텔레 정도는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남부 지역은 물가상승과 달리 원래 돈을 짜게 줬다. 하루 600 텔레이지만, 300도 안 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서쪽으로 많은 청년들이 이동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남부 지역은 급속도로 고령화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청년의 비율이 높아지는 이유다. 또 개발된 도시가 서쪽에 많은 이유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스탄불, 이즈밀, 앙카라, 불사, 코냐, 아이든, 종굴닥, 카파도키아 등 관광명소로 유명한 곳들이 서쪽에 몰린 것도 그렇다. 하지만 시급제가 아닌 이상 뭐가 되었든 짜게 받는다는 인식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서쪽도 동남부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에렌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쪽으로 간 적이 있는데, 하루 새 빠지게 일해도 5-600 받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법이 있어서 뭐 서로 잘못해 신고하면 그만이라고 하나 튀르키예는 허점이 많았다. 아예 불법도 법이라고 할 정도로 불법이 아주 성하다.
카이라만큼은 아니지만 에렌과도 많은 교제를 했다. 에렌의 수업에 껴서 도강(?)한 적도 있다. 물론, 교수님께서 언제든지 오라고(?) 허락해 주셨다. 하우스메이트의 미국인 분들의 친구였는데, 그분들과 에렌이 나와 카이라만큼의 가까운 관계였던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우연히 만난 경우이지만, 하우스메이트들이 에렌과 만난 경우는 꽤 특별했는데, 에렌이 어느 날 꿈을 꿨다고 한다.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 내가 있었어. 그런데, 나 말고도 다른 4명의 사람과 함께 뛰어다니며 그 뜨거운 불과 춤추며 놀고 있었어. 꿈이었는데, 생생하게도 4명의 그들은 내가 진짜 아끼는 친구였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어느 멀리서 큰 소리가 내게 말했어. "다음은 네 차례다."라고 나는 들었고, 잠에서 깼어.
하우스메이트들이 이 말을 듣고 꿈과 환상? 이건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꿈과 환상이다. 미래를 보여주시거나 무언의 뜻을 알려주실 때 꿈이나 환상으로 보여주신다. 나도 여러 번 예수님을 꿈에서 본 적이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적이 있기에 그냥 개꿈이야라고 할 수 없었다. 또 믿는 자로써 그냥 넘어가기엔 지옥이라는 키워드에 흥미가 동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통해 바벨론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고 다니엘을 통해 해석을 듣게 된다. 하우스메이트의 미국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다니엘이었다.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함께 기도해보자라는 말을 꺼냈고, 어떤 꿈이었고, 어떤 뜻으로 주님이 이 아이에게 보여주신 것일까 우리는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진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 그제, 변함없이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며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 주말을 마주하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또 수업을 듣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일요일 오전 2시에, 갑자기 새벽에 에렌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하우스메이트 다니엘에게로.
친구가 죽었어. 자살했어. 미안해. 신을 원망해. 신을 믿고 싶지 않아. 왜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나는 그를 원망해. 연락하지 마. 나도 죽을 거야. 나도 따라서 죽을 거야.
메시지를 받고, 다니엘은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급하게 하우스메이트들을 깨워서 우리는 같이 기도했다. 새벽 오전 2시에 거실에 모여 기도했다. 조용히, 천천히. 제발 에렌을 꺼내어 달라고.
이건 정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자살한 친구가 바로 꿈에서 함께 지옥을 거닐었던 4명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8년 지기,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까웠을지 모를 친구가 자살한 것이다. 집에 혼자 매달려 죽었다. 에렌은 본가에 가본다며 반에서 떠났고, 연락도 끊겼다. 학교에서 만나볼까 대학교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수업에도 나오지 않는다. SNS? 없다. 전화, 메시지 다 안돼. 어떻게 한순간에 이렇게 사라질 수가 있을까 정도로 에렌은 없어졌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 따라서 죽었을까?... 우리는 기도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