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하프 마라톤 완주’였다. 하프마라톤은 21km를 달려야 하는데 이는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만 1시간이 꼬박 걸린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두 번의 환승을 하고 나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이동한다고 해도 삼십 분은 걸린다. 42km를 달리는 풀마라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달리기는커녕 걸어간다고 해도 막막한 거리다.
그런 거리를 4월 고양 마라톤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세 번이나 달렸다. 5km를 달릴 때도, 10km를 달릴 때도 항상 처음 달리는 것처럼 힘들어하곤 한다. 하프를 한번 뛰고 나면 5km 정도는 눈감고도 달릴 줄 알았는데 몸 상태에 따라 죽을 만큼 힘들기도 하다. 중간에 포기하고 3km 정도 뛰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매번 다시 뛰러 나갈 생각이 들다니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잘 잊는 타입이거나 또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분명하다.
오늘(9월 22일) 뛴 마라톤은 충남 공주에서 열린 ‘공주백제마라톤’ 대회다. 매년 9월 중순에 개최되어 살인적인 더위로 유명한데, 올해는 전날 비가 와 그나마 달리기 좋은 날씨에 달릴 수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나의 연습량이었다. 여름 내내 뛰기는커녕 덥다고 잘 걸어 다니지도 않았는데, 연습은 무슨. 이 정도 러닝 마일리지로도 뛸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기만인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하프 마라톤과 달리 언제라도 그만두고 택시를 타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힘들면, 몸 어딘가에서 이상신호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고 뛰기 시작하니 뛰는 먼 거리를 달리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고분의 능선은 아름다웠고, 거리의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반쯤 푸르른 채로 잔뜩 달려 있었다. 왼쪽 무릎에서 시작된 약간의 고통은 다리 이곳저곳에 잠깐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달리기 좋은 날이었다.
천천히 달리다 보니 어느새 10km 지점을 넘어섰다. 10km 이상 달리기는 내 몸에게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다. 이만하면 충분히 되었다는 생각에 11km까지만 가면 그만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11km 지점에 닿자 생각보다 고관절의 움직임이 편안해 멈추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12km까지만 달리겠다고 결심한다.
근데 이상하다, 이제 그만 달려도 된다고 생각하니 막상 더 달려도 될만한 이유가 자꾸 등장한다. 1km 지점마다 거리를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 저 멀리 보여서 보이는 김에 달리기도 하고, 마을 어귀에서 응원 나온 할머니가 팔을 번쩍 들어 하트를 만들어주시는 마음이 감사해 좀 더 달리기도 하다 보니 결국 멈출 수 없는 구간까지 와 버렸다. 생각해 보니 길이 통제되어 택시 부를 수도 없었겠다 싶기도 하지만, 이미 완주한 후였다.
첫 번째 하프 마라톤 완주 후에는 오른쪽 발가락의 발톱이 빠지고 피멍이 들었고, 두 번째 하프 마라톤 완주 후에는 무릎에 통증이 너무 심해 절뚝이느라 한동안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리의 움직임이 상당히 가볍다. 달려야 한다는 압박이 덜해 통증에 보다 신경 쓰며 달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장거리에 그새 적응한 것 같기도 하다. 언제라도 그만둘 결심을 하고 또다시 달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