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트 9. 수연산방 단호박 빙수

먹어대다 떠올린 쓸데없는 생각들, 아홉 번째

by 어니언수프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 아니지만, 나는 서울 그 중에서도 경복궁과 창덕궁 너머에 있는 북쪽 동네를 아주 좋아한다. 가깝게는 서촌과 북촌, 부암동, 그리고 성북동. 서울은 살이에 따라서는 퍽퍽하고 답답하지만, 이 동네가 가지고 있는 오래되며 깨끗하고 전원적인 모습은 수많은 이 도시 생활자들에게 아직 다 들키지 않은 것 같아서다.


꽤 몇 년 전에 지도에 표시해 두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갈 자신은 없었던 수연산방에 다녀왔다. 주말에는 기다려야 할 수 있다 해서 마침 연차를 낸 금요일 오후였다. 성북동은 다녀오겠다고 마음 먹어야만 가게 되는 접근성 낮은 동네라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다. 여기저기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고, 한성대입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가든 운동삼아 수십 분을 걷든 해야 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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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연애를 시작한 후 시나브로 불어난 외견을 견디지 못해 나름대로 식이조절 중이다. 나를 아는 이들은 '그래 봤자 얼마나 쪘다고' 하겠지만 이쯤에서 절제의 끈을 놓아 버리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한다는 것이 탄수화물과 당류 줄이기 인데, 달달한 음식은 제한하고 밥 양도 평소 식사량의 반 정도로 줄였더니 정말 하루종일 배가 고프다.


수연산방에서는 그 고삐를 잠시 놓아야 했다.

호박,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대변되는 '구황작물' 채소를 잘 찾지 않는데, 이렇게 고즈넉한 한국적인 고택에서 차 한 잔 하며 단호박 디저트 안 먹기가 쉽지 않았다. 단호박범벅은 겨울 메뉴로 (5월 10일 현재 아직은 주문 가능하다.) 죽에 가깝다고 점원이 알려 주었고, 날이 더워서 잠시 고민하다 단호박빙수로 메뉴를 바꿨다. 나는 쑥말차 한 잔, 그는 송차 한 잔. 이렇게 하면 대충 4만원 돈 나온다. 한 모금 할 때마다, 아, 천원씩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구나.



단호박 빙수도 나왔다. 단호박의 샛노란 색과 팥앙금 색이 대비를 이룬다. 위에 올라간 하얀 떡은 한 접시째 주면 좋겠다, 떡 추가에 몇 천원 쯤 더 지불할 의향도 있어. 라며 여름날 팥빙수를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 그 쫄깃한 떡이다. 좀 지랄맞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빙수를 이리저리 처음부터 섞어 먹는 걸 안 좋아한다. 여럿이 있을때는 쭈구리처럼 그런 기호를 결코 말하지 않지만 연인과 둘이라면 의견을 피력해 볼 수 있다. 이거, 섞지 말고 떠 먹자.


노오란 단호박과 진한 팥앙금, 연유와 얼음을 한 숟가락에 잘 얹어 입에 넣는다. 아. 정말 비속어 쓰고 싶을만큼 맛있어. 역시 단맛은 진리요 생명이로구나. 게다가 이런 조용한 산자락 주택에서 분위기와 함께라니. 도심의 바캉스가 따로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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