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가체질) 마침내, 핵심 기억을 재처리하기 시작한 은정
은정(전여빈)은 새로 제작하는 다큐 영상을 정리하다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물음을 던지는 자신이 촬영된 모습을 보게 된다. '이상하다, 저때는 홍대랑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는데... 누가 이런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들은 여지없이 자기가 해주던데...' 은정은 사랑하는 연인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워 자신이 마음속에 그 사람을 만들어냈음을, 그렇게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 살아가는 법을 고통스럽게 배워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동안 알면서도 피하고 싶었던 홍대의 부재를 마주한 은정.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나 정말 괜찮은 걸까?
그간의 상담 시간 동안 연인이 없는 이 세상에서 은정 씨가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활동과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루어보았죠. 오늘은 홍대 씨와의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해요. 우리는 가끔 과식을 하거나 내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었을 때,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않고 배 속에 답답하게 처져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아주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마치 체한 것과 유사하게 그 기억들이 몸과 마음의 어딘가에 저장될 수 있어요. 이는 그 사건들을 잘 기억해서 이와 유사한 일이 생겼을 때 나를 더 잘 보호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이기도 해요. 다만 그 기억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뭉텅이로 턱 막혀있다면 체했을 때의 더부룩하고 어딘가 막혀있는 불편감이 지속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요.
은정 씨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홍대 씨를 마음에 품은 채 그와 대화를 유지하는 것도 일종의 얹혀있던 기억들 때문일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얹혀있던 기억들을 소화하는 작업을 진행해보려 해요. 때로는 마치 그 기억과 사건으로부터 갇혀 다른 방법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럴 때에는 약을 먹고 침을 맞는 것처럼 소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촉매제가 필요할 수 있겠죠. 상담에서 저와 함께 거리를 두고 그때의 기억을 다시 살펴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 기억을 떠올릴 때의 강렬한 느낌으로부터 조금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안전하게 기억 노출하기
자 지금 앉아있는 의자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숨을 쉬어볼까요. 코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와 폐가 가득 차고, 이전과는 다르게 좀 더 따뜻해진 공기가 코 밖으로 나와 가슴이 시원해지는 걸 느껴 볼게요.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진행하려 해요. 눈을 감았을 때 너무 멍해지거나 괴로우면 눈을 뜨고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눈을 감으면 더 집중이 잘 되어서 지금은 눈을 감고 진행해볼게요. 우리는 이제 은정 씨가 처음 홍대 씨가 나의 곁에 없음을 인지했던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보려 해요. 마치 그 장면을 제가 영화 보듯 함께 그려볼 수 있도록, 제게 그 장면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이제 은정 씨가 괜찮으시다면 눈을 감고 최대한 자세하게 그 순간을 묘사해 주실까요.
병실에서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더 이상 홍대 씨가 숨을 쉬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 은정 씨가 되어 보실게요. 마음의 눈으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시며, 병실에서 나는 냄새도 맡아보시고, 그 공간의 밝기는 어땠는지 최대한 자세히 떠올려 볼게요. 그 상황에서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느끼며 은정 씨가 어떻게 그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지, 소리, 냄새, 맛, 촉감, 은정 씨가 느끼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최대한 자세히 하나하나 떠올리며 얘기해주세요.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이나 마음에 스쳐간 감정이 있다면 그것도 얘기해주시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지는 게 있다면 그것도 말씀해 주세요. 중간에 제가 불편감이 몇 점인지 여쭤볼 텐데, 0점과 100점 사이로 말씀 주시면 됩니다. 병실에서 일어난 내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그래요, 홍대 씨가 떠난 걸 알아차렸을 때 그 병실에서는 정말이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군요. 집에 돌아온 후, 일상을 마주하려니 곳곳에 홍대 씨가 남기고 간 물건들이 넘쳐난다고 느껴져서 그때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버텨내기가 어려웠네요. 그렇게 나를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된 이후, 병원에서 깨어났더니 홍대 씨를 만나게 된 거군요. 지금 이야기를 하면서 느껴지는 괴로움은 몇 점인가요? 그래요, 지금 힘드실 수 있는데 조금만 더 가 볼게요, 지금 아주 잘하고 계세요. 그때 처음으로 마주한 홍대 씨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어디에서 나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었나요? '나 좀 기억해 줘. 그냥 나 말고, 너랑 같이 행복했던 나. 네가 여기 없으면 누가 여기서 그렇게 행복한 날 기억하겠어?'라는 말을 들었군요. 지금 호흡이 조금 가파지는 것 같아요. 잠시 호흡에 집중해볼까요.
은정 씨, 오늘 우리는 상담에서 그간 혼자서는 마주하기 어려워했던 기억을 조금씩 소화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의 몸의 감각이나 기분은 어떤가요? 오늘 기억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기억의 내용이 있을까요? 아, 그래요. 홍대 씨가 맨 처음 은정 씨에게 했던 이야기가 새롭게 보였군요. 홍대 씨를 떠나보내기 직전의 그 순간에 멈추라는 얘기가 아니라, 비록 나는 이곳에 없더라도 은정 씨와 함께 하며 행복했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했었군요. 그게 어떤 의미에서 새롭게 보였나요? 은정 씨에게 홍대 씨의 부재를 인정해 버린다는 건, 내 삶에서 홍대 씨의 존재와 의미 자체를 지워버리는 걸로 느끼고 있었군요. 그런데 홍대 씨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내 삶에서 홍대 씨의 좋은 존재를 함께 받아들인 채 살 수 있는 방법도 있었네요. 이렇게 두 번, 세 번 같은 기억을 반복하면 처음에 은정 씨가 보지 못한 것들도 새롭게 보이고 그와 관련지어 새로운 해석도 가능할 것 같아요. 오늘 굉장히 힘든 작업일 수 있는데 용기 내어 함께 그 장면으로 들어가 줘서 고맙고 애 많이 썼어요.